중간이 없는 선인장 꽃의 세계
대학생 시절 기숙사에 살았는데 정수기와 방이 멀었다.
머그에 물을 담을 때면
애기들 분유 탈 때 스푼 위 수북한 부분을 싹둑 깎아내듯 물을 담곤 했다.
'왔다 갔다'의 최소화를 위한 결정이었는데 욕심껏 꽉 채우면 딱 그 깎인 분유 모양이 되는 것이 매번 웃겼다.
그 머그는 캐나다 교환학생 시절 스타벅스에서 산 것으로 분홍 + 초록 타일이 박혀있었고 한 손으로 들고 다니기 버거운 무게감을 자랑했다. 뒤돌아보니 캐나다인의 체형에 적합한 사이즈였다.
한 개인의 욕심과 게으름이 물의 형상으로 찰랑대는 그 대형 머그를 들고 방으로 갈 때 내가 매번 준수하는 프로토콜이 있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설렁설렁 걷는다.
리듬을 잘 타는 것이 중요하고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됨.
2. 조심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선택을 믿어야 함.
3. 물이 넘치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확인하는 순간 리듬 깨지고 흘림. 의심 금지.
4. 콧노래를 부른다.
물 옮기는 작업을 필요 이상으로 심각히 열심히 하는 것을 방지함.
5. 손잡이를 잡지 않는다.
무게 중심의 이해. 인형 뽑기 기계가 인형 들어 올리듯 살포시 위에서.
위 다섯 가지를 준수하면 나와 내 머그는 어김없이 방까지 안전하게 당도해 있었고 이 행위는 나에게 크나큰 성취감을 선사하였다.
나는 정수기와 내 방의 거리가 선사한 이 오묘한 가르침을 삶의 곳곳에 써먹었는데 상상치도 못한 지점에서 큰 도움이 되곤 했다. 왠지 모르게 힘든 나날들은 가만 살펴보면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았고
조급해했고
무게 중심을 잡지 않은 채 이동을 강행
하고 있었다.
오늘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여느 날처럼 산책을 하는데 걸음걸이와 내 호흡이 박자가 딱 딱 맞으면서 오랜만에 옛날 기숙사 정수기가 생각났다. 나는 스스로에게 잘 살고 있나 묻지 않는다. 묻는 순간 물은 쏟아진다. 애초에 뭘 딱히 잘할 게 없다는 것만 알면 된다. 먼 길을 가는 데는 설렁설렁이 잘이다.
설렁설렁 (어른체_studiopen_schopenhauer) 3000px X 1000px Procreate, ACCI CALLIGRAPH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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