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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Feb 10. 2023

콧노래를 부르지 않은 죄

중간이 없는 선인장 꽃의 세계


대학생 시절 기숙사에 살았는데 정수기와 방이 멀었다.


머그에 물을 담을 때면
애기들 분유   스푼  수북한 부분을 싹둑 깎아내듯 물을 담곤 했다.


'왔다 갔다' 최소화를 위한 결정이었는데 욕심껏  채우면   깎인 분유 모양 되는 것이 매번 웃겼다.

 머그는 캐나다 교환학생 시절 스타벅스에서  것으로 분홍 + 초록 타일이 박혀있었고  손으로 들고 다니기 버거운 무게감을 자랑했다. 뒤돌아보니 캐나다인의 체형에 적합한 사이즈였다.


한 개인의 욕심과 게으름이 물의 형상으로 찰랑대는 그 대형 머그를 들고 방으로 갈 때 내가 매번 준수하는 프로토콜이 있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설렁설렁 걷는다.

리듬을 잘 타는 것이 중요하고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됨.


2. 조심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선택을 믿어야 함.


3. 물이 넘치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확인하는 순간 리듬 깨지고 흘림. 의심 금지.


4. 콧노래를 부른다.

물 옮기는 작업을 필요 이상으로 심각히 열심히 하는 것을 방지함.


5. 손잡이를 잡지 않는다.

무게 중심의 이해. 인형 뽑기 기계가 인형 들어 올리듯 살포시 위에서.


위 다섯 가지를 준수하면 나와 내 머그는 어김없이 방까지 안전하게 당도해 있었고 이 행위는 나에게 크나큰 성취감을 선사하였다.


나는 정수기와  방의 거리가 선사한  오묘한 가르침 삶의 곳곳에 써먹었는데 상상치도 못한 지점에서  도움이 되곤 했다. 왠지 모르게 힘든 나날들은 가만 살펴보면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았고 

조급해했고 

무게 중심을 잡지 않은  이동을 강행


하고 있었다.




오늘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여느 날처럼 산책을 하는데 걸음걸이와 내 호흡이 박자가 딱 딱 맞으면서 오랜만에 옛날 기숙사 정수기가 생각났다. 나는 스스로에게 잘 살고 있나 묻지 않는다. 묻는 순간 물은 쏟아진다. 애초에 뭘 딱히 잘할 게 없다는 것만 알면 된다. 먼 길을 가는 데는 설렁설렁이다.




자주 안 가는 산책 코스의 뉘 집 선인장인데 빨간 꽃이 거의 반 년째 묵묵히 피어있다. 이 정도면 꽃이 아닌가 싶기도.


집 뒷마당에 피었던 선인장 꽃. 이 꽃은 저리 쨍하게 하루 피어있더니 다음 날 바로 저버려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중간이 없는 선인장 꽃의 세계.

설렁설렁 (어른체_studiopen_schopenhauer) 3000px X 1000px Procreate, ACCI CALLIGRAPHY 2023




#accicalligraphy #실버레이크 #산책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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