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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Feb 08. 2023

퍼포먼스를 할 때 드는 생각

유클리드 등판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할 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대부분 별 생각이 없긴 하지만 가끔은 생각을 하는데 그중 기억나는 하나:


대붓을 먹에 쿡 찍어 줄줄 흐르는 상태로 캔버스에 천천히 옮겨오는 과정에서

줄줄 흐르던 먹은 줄기에서 방울로 서서히 잦아든다.

  

뚝. 뚝.

나름 큰 소리까지 내어가며 큰 붓에 걸맞게 큰 점들을 만들어내는데 이것들이 점 치고는 크다 보니


점인지

선인지

면인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그 퍼포먼스를 한 날부터 한동안 재밌는 공안(公案)으로 남아있었다.


물론 유클리드가 내가 이것을 공안 삼지 못하게 미리 점선면의 정의를 내려 놓았지만 소용없었다.


그건 내게 개인적 의미가 없었다. 남이 찾아놓은 보편성이 내 법계에서도 보편적이려면 체득적 앎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나는 또 굳이 먹방울을 다양하게 떨어뜨리는 이런 작업을 해 보았다.




큰 먹방울은 주변에 미세한 선들을 만들어내고 이 선들은 점 속에도 숨어있다. 120cm X 90cm, 이합장지에 먹, 2014 논현 쿤스트할레 전시작




이걸 그려놓고 오래 쳐다봤다.

화각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옆에서도 보고

무심한 마음으로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클리드가 발견한 보편성이 나의 보편성으로 녹아들었다.


이 작업 후로 나는 세상 모든 점과 선과 면이 개인적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과 함께 옷을 벗고 온천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점선면과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자 입방체(Cube)와 초입방체(Tesseract)도 친해지고 싶어졌다. 3차원의 존재인 나는 입방체와는 금세 친구가 되었으나 초입방체는 아직 욕심임을 깨달았다.




합리적 분석 사고가 유럽인의 병이라고 말했던 한 인도 사두가 떠오른다. 그는 합리적 분석 사고의 틀을 벗어나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 세상의 많은 부분을 더 깊이 알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당 부분 공감한다.


나는 물의 속성과 그것을 둘러싼 상징과 기호를 사랑하므로 물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는 약 4년 전 패들보드를 타기 시작하면서 바뀌게 되었다. 내가 직접 몸으로 부딪힘으로 관찰한 다양한 환경의 물은 내가 책으로 배운 물과 달랐다. 훨씬 더 경이롭고 가차 없고 사랑스러웠다.


입방의 세계에 사는 내가 뭔가를 자꾸 바라볼수록 그것은 입방에서 면으로 선으로 다시 점으로 얼굴을 달리했는데 점까지 내려가서 육안으로 무언가가 관찰될 때면 애틋한 마음이 올라왔다. 마치 그들의 사연을 들어버린 것처럼 나에게 개인적인 무언가로 변해버렸다.


주희는 격물(格物)은 격죽(格竹)이 아니라 했지만 나는 그저 대나무를 바라보는 것도 격물로 가는 방편이라 믿는다.


패들링 하다 쉬면서 물 쳐다보기. 남편이 해안선과 내 어깨 목 헤어라인이 테트리스처럼 맞아떨어진다고 찍은 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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