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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Jan 27. 2023

국가수반급 수행통역의 세계

살면서 가장 빨리 달려본 날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BTS 지민이 파리 어딘가 패션쇼장에서 인파를 몰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카메라 수십대가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는 모습을 보니 10년 전 그날이 떠오른다.




"통역사님, 이번 건은 거절하면 안 돼요! 다른 사업 하지 말고 꼭 이거 같이 해요!"


해외 유력인사 초청사업을 자주 함께해 온 외교부 산하 기관 인사교류팀 과장님. 나는 그 과장님을 참 좋아했다. 말이 별로 없지만 입을 열면 주로 재밌는 말을 하셨고 진지하면서 사려 깊은 스타일이었다.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는 과장님의 간곡한 애원에도 두 번이나 진지하게 거절했다. 장/차관급 통역은 많이 해 봤지만 국가수반급은 처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많이 지쳐있어 뭐라도 손댔다간 망할 것 같았다.


방한이 예정되어 있던 그 인사는 국가수반은 아니었으나 그 이상의 아이콘이었기에 더 부담스러웠다. <레옹>의 감독 뤽 베송이 그녀의 삶을 영화화하기도 했는데(The Lady, 2011), 현재 그녀의 인생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갯속을 걷는 것만 같아 참 알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싶다.




과장님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감당할 스케일이 아니다. 나랑 하면 망할 거다. 협박까지(!) 해가며 재차 거절하자 과장님은 다른 거 다 떠나서 내가 옆에 있기만 해도 큰 힘이 될 것 같다며 진심에 찬 회유를 펼쳐 보이셨다.


아마도 그 지점이었을 것이다. 바늘 끝만 한 틈도 주지 않았던 내 마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


아니, 일개 통역사인 내가 뭘 크게 망칠 영향력도 없을뿐더러 최악의 시나리오라 해봤자 카메라 앞에서 통역 몇 마디 실수하는 거,


망신 좀 당하는 거,

흑역사 좀 생기는 거,

그게 뭐라고 이렇게 고민을 하나 갑자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바로 과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그냥 같이 해요!"




망신당할 결정을 내려버리자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초청 인사가 방한하기 한 달 전부터 내가 CC 된 이메일이 물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 통역사가 미리 숙지해야 할 내용이었다. 총 80통 정도 받은 것 같다.


이메일이 올 때마다 생전 접해보지 못한 스케일에 심장이 덜컹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그렇게까지 긴장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당시 신혼이라 남편과 싸움이 잦았고 없던 이석증도 생겨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였다.


밤마다 통역 실수로 망신을 당하거나 통역이 너무 잘 되어 환희에 차는 꿈을 번갈아가며 꾸었다.




그날이 왔다.


보통 초청사업은 공항에서 시작되지만 이번엔 초청인사가 머물 호텔을 더블체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소공동 조선웨스틴에 관계자들이 모여 호텔에 인사가 도착했을 때 동선 시뮬레이션을 미리 정한 뒤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의 분위기는 차가웠고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포토라인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몇몇 기자들은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긴장되는 판에 그런 모습을 보니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어지럽거나 토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초청인사가 나오면 달려가서 그 사람의 입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현장의 분위기를 보아니 달려가지 않으면 옆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나는 공항에서 함께 대기중인 그 누구보다 초청인사의 옆자리를 차지해야 할 책임을 띄고 있었다.


하필 제일 못하는 게 달리기인 것이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갑자기 커졌고

드디어 그분이 등장했다.


나는 경호팀과 함께 전속력으로 달려 그분 옆자리를 차지했다. 내가 그날 구둣발로 경호팀만큼 빨리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인생 최대 기적이다.


초청인사는 미디어에서 보던 것과 비슷하게 온화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고, 매너가 좋았다.


나는 인사를 건넸다.


"첫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앞으로 한국에 계신 동안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가속도> 그날이 떠올라 아침부터 적은 글씨. 나의 달리기 잠재력을 본 그날을 잊을 수 없다. ACCI CALLIGRAPHY 2023


<업무회의> 머리를 맞댄 채 수많은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고, 함께라서 할 만했다. ACCI PHOTOGRAPHY 2013





#수행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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