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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Mar 28. 2023

팬레터

나를 나되게 한 것들




일요일 오후

돗자리를 챙겨 실버레이크 공원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요긴하게 쓰고 있는 이 돗자리는 내가 일곱 살 때 달성공원 앞에서 팔았을 법한 용모를 지녔다. 총 천연색의 얇실한 플라스틱 빨대 같은 것들로 엮여 있고 접힌 자국을 따라 돌돌 말다 보면 자연스레 손잡이로 귀결되는 - 미국 친구들이 부러워함 - 굉장히 90년대 달성공원스럽게 생긴 것이다.


돗자리에 앉으면 등받이가 없어서 불편하지만 기혼 상태의 드문 장점은 이런 상황에서 등받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남편은 독립 인격체지만 야외 공간에서 내 스페어 등짝이다). 물론 사람 둘만 모이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기능만을 위해 누군가를 소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기혼 상태의 탑재 사양 중 하나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뒤로는 남편 등에 앞으로는 햇볕에 기대 오랜만에 자우림 노래를 들으며 글을 써본다.




열네 살에 자우림을 만났다.

헤이헤이헤이는 아니고 밀랍천사


밀랍천사 도입부에서 김진만과 이선규가 내는 소리를 사랑했다. 특히 이선규 소리에는 1969년 우드스탁이 있었다. 그러다 김윤아가 밀랍천사를 라이브로 부르는 걸 봤는데 그 구역 악령이 다 소탕되는 모습을 본 후로 (문자주의자들을 위한 변: 강렬했다는 얘기) 나는 자우림 음반이 나올 때마다 타워레코드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선규를 신봉했던 나는 당연히 자우림 팬클럽에 가입, 이메일로 팬레터를 보내기 시작했고 간혹 답장을 받기 시작했다. 짧은 회신들이었지만 그가 팬을 소중히 하는 마음은 그득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은은한 웃김'을 지니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좋은 음악이란 좋은 사람이 내는 소리라는 이상한 믿음을 지녔던 나는 그의 존재로 그 믿음을 기정 사실화 하기로 했다. 자우림이 내는 모든 소리는 내게 좋은 소리요 복음이었다.




자우림 팬클럽에서 정기적으로 날아온 간행물로부터 나는  영감을 얻곤 했는데 하루는 김윤아가  소식지와의 인터뷰에 이런 류의 말을  적이 있었다 


노래를 잘한다는 건
누가 높은음을 내느냐가 아니라
자기 음역대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낼 줄 아는 거라고 생각해요.


중딩의 나는 저 말을 듣자마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부터 삶의 이정으로 삼았다. 당시 그녀는 20대 중 후반이었는데 저런 말을 어떻게 할 줄 알았을까. 김윤아가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생이지지(生而知之) 형 아티스트로 공고히 자리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고3 겨울에 자우림 대구 콘서트가 취소된 적이 있었다. 그날 만을 바라보며 살던 나는 취소 소식에 며칠 식음을 전폐한 상황에서 당연히 또 눈물의 팬레터를 보냈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 회신이 왔다. 이선규의 진심 어린 위로에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라면 하나를 끓여 먹고 연말 서울 공연을 예매했다(그 공연 보러 가는 게 또 길가메시급 여정이었으나 다음 기회에...)




방금 글 쓰면서

2022 가요대제전 자우림 영상을 봤다.

김윤아는 공간적 어쿠스틱에 기댈 필요 없는 앰프 달린 목소리를 지녔는데(락페에 최적) 저렇게 방송세트장에 올려놓으니 관객들 배려하느라 소리를 살짝 삼키는 것 같다. 멋지다.


달성공원 돗자리를 실버레이크 공원에 아무렇지 않게 깔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자우림. 사실 이 글을 통해서는 그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했던 모든 뻘짓들을 10퍼센트도 설명하지 못했다(나는 뭔가가 좋으면 죽어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성향은 내 인생의 특정 지점까지 좋은 동력이 되어주었다).


일주일이 다르게 변모하는 한국 음악씬에서 사람에 대한 그들의 진심이 없었더라면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계속 커져만 가는 그들의 존재감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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