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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Apr 15. 2023

사막에서 사랑하기

연희 지구설




사실 엊그제 사막에서 좋은 일이 있었다.


첫 번째 정상에 도착하여 모래 속에서 다시 태어난 나는 부활한 김에 바로 앞에 더 높이 솟은 또 다른 정상에 가고 싶어졌다.


"여보, 우리 저기도 가볼까?"


"정말? 당신 꼭대기 정복하는 거 싫어하잖아. 오늘 웬일이야?"


"나 지금 너무 피곤한데 너무 힘이 넘쳐. 가보자!"


꼭대기 좋아하는 남편은 내가 먼저 가자고 해줘서 굉장히 행복한 모양이었다.




두 번째 정상 찍기를 위해 첫 발을 내디딘 순간 나는 내 결정을 후회했다. 그러나 남편이 환하게 웃는 걸 봐버렸기에 약속한 바를 무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죽은 몸이요'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수밖에.


그 사이 모래는 더 뜨거워졌고 나는 내 발가락 사이 피부 감각이 발바닥이나 발등보다 훨씬 민감한 인간으로 살아왔음을 최초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정상의 마지막 구간은 경사가 심해 머리를 모래에 쳐 박는 느낌 + 네 발로 기어야 했는데 팔다리 근육이 골고루 잘 발달한 남편은 나보다 더 깊이 푹푹 빠져가면서도 잘 올라갔다. 나는 다리에 비하면 팔은 거의 장식용이라 남편처럼 네발짐승이 잘 되지 않았다.


"여기 올 수 있겠어? 당신 너무 어려울 거 같은데... 나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저 멀리 옆 길로 돌아서 천천히 와!"


남편 말을 잘 듣지 않는 나는 네 발로 가열차게 기어오르다 줄줄줄 데굴데굴... 오르다 또 줄줄줄을 수 차례 반복했다.


언젠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봤던 엄마곰 아기곰 눈산 오르기 영상이 떠올랐다. 엄마가 꼭대기에서 기다리는데 아기곰은 꼭대기 근처만 가면 돌돌돌 굴러 떨어져 화를 많이 자아낸 영상이었다. 살면서 눈산 오르는 아기곰 심정을 느껴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결국 여덟번 정도에 그 아기곰처럼 성공했다.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도전'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지만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라면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편이다.


너무 앞만 보고 몰입한 나머지 정상에 올라와서도 정상인 줄 모르고 곰 자세로 몇 미터를 더 기어갔는데 그걸 본 남편은 숨을 쉬지 못했다. 평소에 미소는 잘 짓지만 넘어가면서 웃는 건 잘 없기에 남편이 그렇게 웃는 게 좋았다.




남편이 자지러지는  보며 웃음 발동이 걸려버린 나는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 쉬며 '헥헥' '하핳' 바삐 오갔다. 모래바람이  웃는 입안을   없이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입을 다물 때마다 '찌그럭' 소리가 났다. 침을   뱉는 나는 모래가 입에 들어온 김에 -그냥 삼키면  아플까 - 잘근잘근 씹어 삼켰는데 모래 먹는 내가 웃겨서 한참을 헥헥거리다가


이제 좀 진정해야지 하고 양반다리 양쪽으로 펼쳐놨던 손으로 모래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냥 만지면 재미없으니 내 손목이 월링더비시(Sema춤추는 수피승)한다 생각하고 뱅글뱅글 돌리며 서서히 모래 속으로 진입했다.


한반도 동해안 모래였다. 뉴멕시코에 있는 화려한 백색모래를 처음 만졌을 때의 밀가루 느낌이나 코럴샌즈의 살구빛 촉감이 아닌 적당히 거칠고 부드러운 내 고향 모래.


콜로라도에서 내 고향 모래를 만지니 올해도 두릅을 못 먹고 봄이 지났네 싶었다. 엄마가 봄마다 신문지에 둘둘 말아 보내주시던 두릅. 두릅을 신문지에 돌돌 말던 엄마. 뭐든지 신문지에 돌돌 말던 우리 엄마 연희. 우리 엄마는 이름도 예쁘네.


연희는 지구다.

지구가 나를 사랑함을 연희를 통해 배웠다. 연희는 자신의 자궁으로 나를 지구에 연결시켰다. 이보다 거대한 작업이 또 있을까.


손목의 세마가 무르익고 모래 속 짙어지는 시원한 수분감에 빠져들수록 지구연희의 무한한 창조력과 사랑이 내 안에서 공명하기 시작했다. 발가락에 불이 나건 말건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뜨거운 마그마로 나를 녹여 한 몸의 사랑 덩어리로 존재하게 했다. 연희의 사랑은 나를 울게 하지만 지구연희는 나를 흐느끼게 한다.


이게 엊그제 사막에서 일어난 좋은 일이다.


옆에 있던 남편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당신 왜 울어!?! 배고파?!?"


"어. 이제 내려가자."




 Great Sand Dunes National Park (엊그제) Coral Pink Sand Dunes (재작년)
Zion National Park, Utah (어제) 그리고 뉴멕시코 주의 백색모래가 있는 White Sands National Park(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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