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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Apr 18. 2023

스몰톡 싫어하는 사람의 하이킹

Dream Lake, Colorado Rocky





"오늘이 평년 대비 50년 만에 가장 따뜻한 날이야! 날씨에 아주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네! 나는 너무 두껍게 입고 왔지 뭐야!"


눈밭이지만 햇살이 따뜻하길래 옷을 가볍게 입고 양반다리를 하고 눈을 감고 있는데 뒤통수에다 대고 누군가 굳이 정적을 깨트리는 스몰톡을 걸어온다.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길 바라기엔 너무 나 밖에 없었기에 뒤돌아 보는 수밖에 없었다.


목에 망원경을 멘 산타 할아버지가 서 있다.

나는 정말이냐며, 오늘 내가 얼마나 럭키한건지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정도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갈 길을 가려는데


"우리 엄마가 여기 100년 전에 시집왔을 때는 2차선 도로도 없었어. 그래서 차가 서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기다렸다가 지나가고 그랬지. 어! 잠깐만. 저건 블루제이야!(목에 달랑거리는 망원경을 눈에 끼워 맞추며) 어, 그래서 그때는 날씨가 요즘보다 훨씬 더 추웠는데..."


할아버지가 귀엽긴 했으나 말이 너무 많으셔서 점점 힘들어졌다. 내가 한참을 뒤따라 오지 않는데도 후진해보지 않는 남편을 속으로 원망하며 눈과 귀로는 할아버지 옛날이야기를 열심히 들어드렸다. 나는 어르신에게 리액션 좋은 병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리액션을 덜 해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앉은 자세에서 일어나 잠바를 주섬주섬 챙겼고 할아버지가 이걸 '우리 이제 헤어지자' 신호로 받아들이시리라 생각했지만 내가 한 걸음 두 걸음을 옮기자 같이 걸으며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본의 아니게 산타 할배 일가의 덴버 정착기를 다 들어버린 나는 가까스로 빠이빠이를 하고 기가 다 빨리고나서야 너털너털 남편 지점에 도착했다. 왜 후진도 안 해보고 가냐고 남편 등을 주먹으로 있는 힘껏 때렸다.


남편은 두꺼운 등산복 안에서도 자기 방어를 위해 등 근육에 힘을 줘서 충격의 파동이 내 주먹으로 고통을 고스란히 돌아오게끔 하였다.




나는 스몰톡을 싫어한다.

각 잡고 진지한 대화 하는 건 좋아하지만 낯선 사람과 지나칠 때마다 하는 짧은 인사는 굉장히 귀찮다.


스몰톡 문화도 지역차가 있는데 관광객이 많은 곳일수록 수그러들고 산세가 험준할수록 활발하다.


나는 평소엔 앞장서 걷는 걸 좋아하지만 트레일 전방에서 누가 오는 것이 포착되면 갑자기 남편 뒤로 숨듯이 걷는다. 남편과 나 그리고 전방에서 오는 사람의 각도를 미세하게 조절해서 굳이 인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인사를 끝내 놓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앞으로 박차고 나간다.


전방에서 별다른 인기척 없다가 스텔스기처럼 나타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상대해야 하는데 그럴 때 내가 가장 자주 하는 인사는 'hey.'다. 'Hey~!'말고 'hey.'


지쳐 있을 땐 'ey.'도 한다.

중저음의 미소 띤 얼굴로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짧고 캐주얼하면서 친근한 표현인 저 한 음절을 구사한다. 그럼 보통 사람들은 'hey'에는 'hey'로, 'ey'는 'ey'로 받는다. 세상은 나의 거울이라는 게 증명된다.


하나의 트레일이 보통 4마일 정도라면 'hey'를 20번 정도 하게 된다. 할 때마다 주유 뚜껑이 열려 기름이 조금씩 새어 나간다. 이걸 안 해도 된다면 나는 12마일도 거뜬하게 다닐 것이다.


근데  웃긴  내가 헤이를  했을  상대도 아무런 말이 없다면 섭섭함이 올라온다는 것. 이런 케이스는 미국처럼 인사 활발한 나라에  없지만 100  하나는 있다. 이쯤 되면 나도 나를 모르겠다 어쩌란 말인지.




남편은 헤이나 에이를 하지 않고 완성된 문장을 구사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험준한 트레일에 교통 체증을 만들어내는 사람.


완성형 문장으로 인사를 받은 미국인들은 대게 뭐라도 산행에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해 주려 혈안이기 때문에 그걸 다 들어주고 고맙단 말을 세 번 정도 하고 가야 된다. 내가 본 미국인들은 '나는 남에게 이렇게 친절하고 세상에 도움 되는 사람이야!'의 자아상에 열광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따뜻하다.

다른 데 말고 저런데 열광이니 얼마나 귀여워. 적어도 국립공원에서 만나는 미국인들은 대부분 저렇게 귀엽고 친절하다.


대부분 백인이라는 게 애석하긴 하지만.




좌: 깡깡얼은 드림레이크. 중앙: 산타할아버지가 말 걸기 전 남편이 찍어놓고 먼저 자기 갈길 감. 우: 돌 주변에 흐르는 물
좌: 드림레이크 건너는 남편. 우: 점심 먹는 남편 (우측 돌에 앉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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