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CCI Apr 19. 2023

캐년에서 길 잃기

Zion, Bryce, Gunnison Canyons

 



모래밭과 눈밭을 구르며 콜로라도에 있는 국립공원을 돌아본 우리는 캐년에 던져 놓으면 쉬이 눈에 띄지 않을 인종이 되어 돌아왔다.


오랜만에 출근하는 남편 귓등에 새살과 헌살로 무늬가 났길래 살살 긁어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참았다. 남이 남편을 보는 시선보다 남편 새살 잘 돋는 게 더 중하기 때문이다. 당신 귀에 무늬가 있으니 알고 있으라고 말만 해줬다. 다행히 남편도 자신의 새살이 소중한 모양인지 손대지 않았다.




콜로라도에서 집에 오는 길에 예정에 없던 자이언 캐년(Zion National Park)에 들렀다.


캐년은 국어로 협곡이지만 한국에 협곡은 있을지 몰라도 캐년은 없다. 통역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이 있다면 인간이 육근六根에 기대 현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와중에 언어 속에 녹아있는 문화의 장벽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딸기는 없었다. 오로지 한국 딸기 미국 딸기만 있을 뿐이었다. 보르헤스가 '원문에 못 미치거나 넘어서는 번역은 있어도 원문에 합당한 번역은 없다'(Penguin Classics <On Writing> Jorge Luis Borges, pg.53)고 했던 말은 적어도 내 세계에서 유효했다.


남편이 장 시간 운전에 지쳤는지 트레일 입구를 잘 찾지 못했다. 나는 어차피 하이킹 생각은 없었기에 속으로 잘됐다 싶었지만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것에 대단히 스트레스를 받는 편인 남편 얼굴은 점점 못생겨지고 있었다.


진정시키고 싶었다. 이럴 때 '진정'하라고 말하는 것은 시한폭탄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으므로 나는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자기야,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게 어딨어. 우리 그냥 놀러 왔어. 여기도 예쁘고 저기도 예뻐. 그냥 재밌게 놀면 돼.'


이런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자니 얼굴엔 절로 미소가 번졌다. 남편을 구원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나부터 이렇게 천국에 있는 것이다. 남편은 공감해  여자보다는 자기를 끌어올려  여자가 필요하다고 내게 고백한 적이 있다. 자기가 힘든데 나까지 힘든 표정 하며 "괜찮아? 힘들지?" 하면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그날 고백 사건 후로 나는 남편이 지옥에 있건 말건 웃는다.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도 나처럼 웃고 있다. 내가 힘든 사람 앞에서 이러는 대상은 오로지 남편뿐이다. 공감 대신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은 또 살다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잘못 들어선 길은 예쁘고 조용했다.

 

자이언 캐년이 지닌 기운은 그랜드 캐년을 가뿐히 넘어선다. 그래서인지 지구촌 곳곳에서 날아온 다양한 사람들이 소복하게 모여 오랜만에 영어가 들리지 않았다. 그것도 나름 좋았지만 이렇게 길을 잘못 들어선 덕에 대자연을 오로지 남편과 독대하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홀했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넓적하고 큰 바위를 하나 골라 기어 올라갔다. 4월의 자이언은 완벽했다. 그 위에서 남편은 눕고 나는 해를 등지고 앉아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람과 물이 우리를 통과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캐년은 무서운 생김새와 달리 한 없이 따뜻한 곳이다.


따뜻한 생각이 자꾸만 떠오를 뿐 아니라 몸도 따뜻해진다.


자꾸만 따뜻해진 자이언은 나에게 바쁘게 살지 말고 뭐든지 자기한테 먼저 물어보고 하라고 했다.




자이언 캐년(4일 전). 이끼를 좋아한다. 핸드폰에 이끼 사진이 수백장 있지만 하나만 올려봄.
좌: 자이언 캐년(작년)에서는 트레일 간 셔틀로 이동한다. 중앙, 우 : 브라이스 캐년(작년)
좌: 자이언 캐년(4일 전) 우: 홀스슈밴드(작년) 협곡
좌, 중앙: 거니슨(Gunnison)의 검은 캐년(지난주)과 브라이스(Bryce)의 살구빛(?) 캐년(작년)의 색채 대비. 우측 자이언(Zion)도 붉은 캐년인데 능선이 더 굵음



작가의 이전글 스몰톡 싫어하는 사람의 하이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