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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Apr 21. 2023

산책하다가

쿨병(cool病)이 완치됨






여독이 풀렸다.


여행은 정말이지

집에 오기 위해 하는 것이다. 집에 오니 너무 좋다. 온 집안 살림살이의 안부를 물으며 오랜만에 오전 루틴을 끝내고 가뿐한 마음으로 산책에 나섰다.


여행 후 왠지 색다른 산책을 해보고 싶었던 나는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와 온몸이 대자유한 상태로 팔다리를 휘저으며 걷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네모낳게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으니 행복했다.


저수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신나게 걷다가 불현듯 지난 일주일간 야생에서 단련한 다리 근육을 최대한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에 알록달록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실버레이크에서 활동하는 스트릿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모여있어 좋아하는 곳이다.




계단 구간은 3 단계로 나뉘어 있다.


1 단계를 쉬지 않고 꼭대기까지 가면 숨이 차오르기 마련인데 왠일인지 멀쩡했다. 그런데 눈앞에 뭔가 비현실적인 것이 나를 가로막았다.


키아누 리브스.

그가 2단계 계단 입구에 걸터앉아 길을 막고 있었다.


일차적으로 든 생각은 '저 사람이 지금 내 2단계 계단 운동을 막고 있네' 였다. 그의 눈을 한번 쳐다본 나는 계단이 막혔으니 좌측 길로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방향을 꺾자마자 이차적으로 든 생각은 '저기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있는데 왜 멈추지 않았지? 나 저 사람 좋아하는데?'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3차 4차 5차 번뇌가 나를 후드려 팼다.


'왜?'


'아니, 왜!?'


'도대체 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냥 그 자리를 떠났어!? 키아누 리브스야! 니가 좋아하는 캐나다 자연인! 언제 또 볼 거야! 이런 한적한 길거리에서 언제 또 보냐고!'


10분 거리에 헐리우드가 있고 동네에 영화 종사자들이 많이 살다 보니 배우를 길에서 마주치는 것이 난리 칠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배우를 맞닥뜨린 건 다른 일이었다.




남편이 집에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에게 소리쳤다.


"나 오늘 산책하다 키아누 리브스 만났어!"


"그랬어? 잘했네."


"잘하긴 뭘 잘해! 진짜야!"


"어 당신 믿어."


'믿는다'는 말이 이렇게 기분 나쁜 말인지는 또 처음 알았다. 남편은 말을 이어갔다.


"당신 옆집 제씨 아저씨 얼굴 외우는데 삼 년 걸렸나? 제씨가 머리 묶으면 아직도 못 알아보잖아(웃음). 실버레이크에 키아누 리브스 닮은 사람 정말 많은 거 알지?"


여기서 나는 내 감정의 안위를 위해 설명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남편을 사랑하므로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동네 3단계 계단 구간 있잖아. 거기 내가 1차 계단 꼭대기 딱 올라섰는데 사람들이 열명 정도 모여있는 거야. 2차 계단 막고 있어서 살짝 짜증이 났는데 거기 입구에 키아누 리브스가 사자처럼 앉아 있었어. 옆에 팬으로 보이는 사람이랑 사진 찍으면서. 제씨는 흔한 미국상이라 그렇지 내가 좋아하는 배우 몰라보겠어?"


"그래?(이제 좀 믿음) 사진 찍었어?"


"하필 내가 오늘만 핸드폰이 없었어. 자이언 국립공원 갔을 때 자이언이 핸드폰 너무 들고 다니지 말래."


"그랬구나... 자이언 때문에 하필 키아누 리브스를 만난 오늘만 핸드폰이 없었구나...(웃참) 알았어."


멀쩡한 사람 양치기 만드는 화법에 잔뜩 약이 올랐지만 내가 내 입으로 얘기를 하면서도 묘하게 남편의 반응이 이해가 되는 것에 한층 더 화가 치밀었다.


"당신은 지금 그 웃음 참는 표정으로 이 귀한 이야기를 계속 들을 자격을 상실했어. 좋은 저녁 보내."


농담 반 진담 반 선포 후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릴 적부터 나는 쿨병(cool病)이 있었다. 키아누 리브스를 보고 바로 방향을 튼 것도 오랜 단련으로 인함이었다. 특히 군중심리에 동조하는 걸 싫어했고 남들 다 하는거 안하고 남들 안 하는 거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게 멋지다는 생각을 20대 후반 쯤엔 그만 둘 줄 알았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오랜 나의 지병으로 인해 잃어버린 경험의 기회들을 한데 뭉쳐 키아누 리브스가 계단에 앉아 있는 모습을 슥슥 그려보았다.


1초밖에 안 봤지만 그는 야생에 노닐던 사자가 잠시 사람 옷을 걸친 것처럼 맹렬하게 부드러운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빛나는 그를 보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미소에 다른 사람들 처럼 동참 좀 하면 어때서! 걸어 다니는 대자연같이 생긴 사람 넋 놓고 좀 보면 어때서! 왜 그냥갔어 왜애애!


쿨병은  마디로 BS(bullshit) 삶이다.


인생에 BS만 좀 쳐내도 한층 본질에 가까운 예쁜 존재로 있을 수 있다.



Cut the BS in your life (synt_procreate) 3000px X 1000px,  ACCI CALLIGRAPH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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