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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Apr 24. 2023

나를 봐주는 사람

BEEF를 보다가





갓 내린 커피를 손에 쥐고 창가에 서서 출근 행렬을 바라본다. 햇살에 춤추는 나뭇잎이 어릴 적 엄마가 물에 헹궈주시던 투명한 김치를 닮았다.


"아찌는 커서 뭐 할 거야?"


엄마는 씻은 김치를 젓가락으로 잘게 찢어 내 밥에 올린다.


"나는 예술가! 이거 봐봐! 잘 그렸제?"


"헤헤이! 역시 우리 아찌는 못하는 게 없네!"




김치를 물에 헹궈먹던 시절부터 평생 출근하지 않기로 슬슬 작정을 했던 것 같다. 어린 내가 봐도 '출근'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내게 약속한 대로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다 미국에 오자마자 처음 출근이란 것을 해 보았고 4년 좀 넘어 그만두었다.


거기 있으면서 모든 인간의 '왜 저래?' 뒤에는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음을 배웠다. 머리로만 알던 것을 온몸으로 알고 나니 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요즘 이곳은 온통 BEEF 이야기다.


좋아하는 작가(David Choe)가 나온다기에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며칠 만에 다 봤다. 끝으로 갈수록 인류애가 샘솟는 부작용이 있는데 내용은 결코 성난 사람들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원수지간의 두 사람이 마지막에 향정신성 열매를 먹고 하나의 의식으로 합쳐지는 부분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흐느끼며 말한다.


"너 불쌍해서 어떡해..."

 

저 한 마디의 임팩트를 위해 감독은 9개의 에피소드를 빌드업 카드로 사용한다. 빌드업마저 각각 하나의 온전한 세계관을 담고 있는데, 굉장히 사적인 감성으로 인류 보편의 정서를 건드리는 시각적 장치와 사운드트랙 David Choe의 회화까지 오랜만의 신선함이었다.


서로를 불쌍해하는 저 후반부 한 마디가 참 좋았다. 참고로 나는 신세한탄류의 콘텐츠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성인으로 누리는 정서적 안정의 4할은 내 첫 스승이었던 엄마 그리고 아빠덕이다. '역시 우리 아찌는 못하는 게 없네.' 따위의 말을 자꾸 듣다 보면 정말 그런가 싶어 이것저것 자꾸 해 보게 되고 정말 그런 삶으로 길이 나기 쉽다.


부모 영향이 4 할인 것은 타고난 내 성정이 3이고 나머지 3은 삶이 던진 온갖 퀘스트를 깨고 얻은 힘 같아서다. 그래서 인생의 7은 주어진 대로 나머지 3 정도는 미개척 구간처럼 내가 어떻게 해 볼 여지로 다가왔다.


이 나머지 3의 미개척 구간을 확장해 가며 내 성정을 조금이나마 다룰 수 있는 수준에 닿자 내 7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과거도 재생성되었다. 과거는 사건이 아닌 해석으로만 존재했고 유행遊行을 거듭할수록 더 그랬다.


내가 타고난 성정은 한 순간에 나를 파괴하거나 구원할 만큼 어린 나를 압도했다. 나는 좀 편하게 살고 싶어서 일찍이 종교와 철학에 심취했고 20대엔 홀로 여행을 떠났다. 종이에 쓰인 철학은 내게 죽은 글이었지만 철학자들이 인간으로 지녔던 고민과 그들의 삶 자체는 내게 생생히 살아있었다.


프리다를 찬양할 때 내 심장을 건드리는 건 그녀의 작품이 아니라 그런 걸 만들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자리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이 철학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자리는 내가 이런 감당 안 되는 성정을 지닌 인간으로 존재함에서 오는 고통을 깊숙이 바라봐 주었다.


바라봐주니 살 것 같았다. 그들은 내 삶에 내 가족보다 실재했고 특히 불면을 친구 삼아 검고 깊은 천장을 바라보던 수많은 밤에 그랬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바라봐 준 덕에 인생의 큰 숙제를 어린 시절에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BEEF의 여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7에 압도당해 흉측한 자아상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했고 끝내 '성공'했으나 공허와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 거의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자신의 속을 깊숙이 바라봐 준 자신의 원수에 의해 전환점을 맞이한다.


나를 깊숙이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살만하다. 나부터 남을 깊숙이 바라봐주면 이런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남을 깊숙이 보다 보면 그 안에 내가 있다.


저렇게 살아 버릇하다보면 사실 자기가 자기만 바라봐 줘도 삶은 충분한 것 같다.


그러다 심심하면 한번씩 남도 바라봐주고.


BEEF를 보다 이런 잡스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산책하다 주웠다. "오늘 땄어요. 내일은 더 많아요" 너무 귀엽ㅋㅋ 창문으로 몰래 누가 가져가나 보면서 흐뭇하게 웃고 있을 주인 상상해 버림


주운 자몽으로 에이드를 만들었다. 유통망을 거치지 않은 오늘 딴 자몽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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