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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Apr 27. 2023

자몽 먹는 법




최근 들어

내 안의 와일드지수(wild index)가 하락하는 느낌에 추적 관리를 위한 새로운 매거진을 시작했다.


자몽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최근 들었던 가장 와일드한 생각이 자몽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와일드지수'는 방금 내가 만든 말이므로 검색해 보면 블랙핑크의 지수나 엥겔지수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자몽을 먹는데 많은 트렌드를 거쳤다. 물론 나 혼자 일으키고 추종한 내 안의 트렌드다.


내 속에 얼마나 많은 내가 존재하는지 아는 사람은 '혼자만의 트렌드'라는 말에 이미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내 안에 내가 많다는 말은 수십조 개의 마이크로바이옴에서 수십 개의 페르소나까지 기와 이를 아우르는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데리고 사는 게 힘든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인체 내 아미노산이 이동하는 짤을 보았다. 내 몸속 작은 일꾼 하나가(아미노산 전달효소) 아미노산을 머리에 이고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아미노산 전달체의 노고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이지 엄연한 하나의 제국이자 우주였고 온갖 트렌드가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시공간이었다.




요즘 내가 먹는 자몽은 동네 자몽이다.

마트에서 파는 투명한 선홍색 과육이 아닌 노랑 과육에 쓴 맛이 덜하고 당도가 높으며 무엇보다 즙이 풍부하다.


며칠 전 글에도 사진을 올렸지만 동네에 자몽나무가 많다. 그중 어떤 주인들은 담벼락 같은 데다 '공짜'라고 써 놓고 그날의 수확을 나눔 한다. '공짜'도 귀여운데 어떤 사람은 저렇게 '오늘 땄고 내일 더 많다'는 귀여워 미칠 것 같은 문구를 써 놓는다. 저런 식으로 나오면 다음날도 가 보는 수밖에 없다.

다음날 가 보니 여덟 개나 있다.

사실 이 집의 자몽철은 두 달 전에 끝났다. 아래 사진은 이 집 자몽 리즈 시절:

아시 자몽이었던 것 같다. 아시 자몽이란 한 해의 첫 수확을 말한다. 다른 과일에도 쓸 수 있는데 아시 참외, 아시 수박 등 대부분의 과일은 아시가 예쁘고 맛있다. 경상도에서 쓰는 말이다. 서울사람들은 첫물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본격 트렌드 분석에 들어가 본다.




2000년대 중반

자몽을 처음 접했던 시기.

마트에 파는 자몽을 반으로 갈라 과도로 과육 사이 내피를 따라 살살 길을 낸 다음 꿀을 뿌린다. 아카시아꿀이 가장 적합하고 피해야 할 꿀은 밤꿀이나 잡화꿀(자몽의 시트러스적 정체성을 무너뜨림). 티스푼으로 과도가 낸 길을 따라 한알씩 쏙쏙 파먹는다. 즙이 자작하게 남은 끝 무렵이면 반구형의 자몽을 입으로 가져가 한 손의 악력만으로 젠틀하게 반으로 접으며 착즙을 끝낸다.


2000년대 후반

이 시기에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자몽을 속껍질까지 한 알 한 알 다 깐 후 예쁘게 한 줄로 접시에 진열했다. 속껍질을 벗은 자몽은 황홀했지만 남편이 없을 땐 그 맛을 볼 수 없었다. 내겐 너무 노동집약적이고 치밀한 방식이라 라이프스타일에 맞지 않았다.


2010년대 초반 - 중반

남편이 깐 자몽을 이교도적 방식으로 따라 해 보았다. 남편의 자몽이 맛있는 이유는 혀에 속살이 직접 닿아서라는 것에 착안을 하고 칼로 속살이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으로 슥슥 자르기 시작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으나 과육 낭비의 오점이 있었다.


2010년대 후반 - 최근

2010년대 초 중반 방식의 문제점은 아무리 내피를 속으로 감춘 컷이라 한들 결국은 씹히게 마련이라 과육의 단맛으로 시작해 내피 맛으로 마무리되는 씁쓸한 결말에 있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참을성이 배양된 나는 2000년대 후반 남편의 방식을 채택했다. 노동집약으로 창출된 잉여가치의 맛은 황홀했지만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일었다.


어제

이것저것 다 귀찮아진 나는 2000년대 중반 내가 처음 먹었던 방식을 택하되 처음과 마무리 동작만 하기로 했다. 자몽을 반으로 갈라 바로 입으로 가져가 쭈욱 짜며 반으로 접어본 것인데 입으로 들어간 과즙보다 얼굴 전체에 도포된 양이 더 많았다. 화가 많이 올라와 다시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네 쪽으로 잘라 한 조각을 마우스피스라 생각하고 꼭 깨문 다음 쏙 뽑아먹었다. 여러모로 흡족해서 향후 3개월 정도 트렌드 유지를 예상한다.




최신 트렌드에 따른 자몽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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