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초크 철이다.
시장에 나와있는 아티초크를 보니 스물 세살 스위스가 생각난다.
친구가 초록색 연꽃을 닮은 열매를 한참을 찌더니 내 얼굴에 들이민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사이로 부처님이 걸어나올 것 같은 이 채소를 나는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이게 뭐야?"
"아티초크. 몰라?"
"어. 먹는거야?“
"하하하하. 어!"
친구는 가장 바깥 잎을 하나 떼더니 랜치소스에 푹 찍어 아랫니로 밑동만 쏙 긁어 먹고는 껍질을 접시에 놓았다. 먹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먹는거야! 너도 해봐."
나는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한창 마음의 문이 열려있던 시기라 그대로 해 보았다.
(조심조심 야금야금... 눈 커짐)
"이거 뭐야? 왜 맛있어?"
"어이없지? 나는 이거 볼 때마다 너무 웃겨. 인류 최초로 이걸 먹어보기로 한 사람 얼굴이 아마 지금 니 얼굴 같았을까? 정말 못 먹을것처럼 생기지 않았어? 이걸 따서 집에 가지고 가서 냄새를 킁킁 맡아보기도 하고 어쩔까 궁리를 하다 물에 넣고 삶았겠지. 그리곤 잎을 하나 떼서 이렇게 홈냥홈냥 먹어봤을 거 아니야. 잎은 도저히 못 먹겠고 밑동은 그뤼에르 치즈향이 묘하게 감도는 감자맛이라 또 놀랬을 거 아니야! 그리고 그 다음 날 가서 다 따왔을 거 아니야!"
그날 이후 나는 아티초크의 노예가 되었다. 친구가 이 채소에 귀여운 서사를 입혀버린 탓도 있지만 밍밍하고 담백한 게 내 취향이었다. 시즌 내내 먹으며 엄청난 양의 껍질을 내다버렸다. 꽃봉오리처럼 꽈악 웅크린 잎들의 피보나치 배열을 따라 하나하나 떼 먹다보면 음식물 쓰레기가 원래 열매 크기의 세배는 되었다.
스위스에서 가족들을 위한 기념품을 사고 남은 돈으로 내 머리통만한 아티초크를 샀다.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았다. 옷에 돌돌말아 귀하게 잘 숨겨 와서는 부모님 댁 냉동실에 넣었다. 스물 세살의 나는 그 채소가 냉장실에 더 어울린다는 걸 몰랐고 오랜만에 한국에 온 나는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로 갔다.
"아찌! 냉동실에 있는 이 시커먼거 뭔데? 엄마 깜짝 놀랬잖아!"
엄마가 말한 시커먼 게 뭔지는 몰랐지만 왠지 내가 범인인 것 같았다. 엄마의 상세한 설명을 통해 그건 냉동실에서 황망하게 갈변한 아티초크임을 알 수 있었다.
"엄마... 그거 나 엄마줄라고 스위스에서 사 왔는데... 미안한데 좀 버려줄래?"
엄마가 참 좋아할 맛이었는데 속상했다. 엄마는 아티초크를 못 먹었을 뿐 아니라 냉동실에서 시커먼 머리통같이 생긴 걸 보고 깜짝놀라 가슴을 쓸어내렸으며 쓰레기 처리도 해야했다. 그런 짓을 많이 했다 어릴 때. 좋은 의도로 시작해 민폐로 마무리되는.
오늘은 새로운 길로 산책을 갔다가 난생 처음 아티초크 나무를 보았다. 검색해 본 적은 없지만 보자마자 알 것 같았다. 심장이 벌렁벌렁 대면서 냉동실에서 갈변사(!)했던 스위스 아티초크가 떠올랐다.
이번에 한국 갈 때 캘리포니아 아티초크를 옷에 돌돌 말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