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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Jun 04. 2023

실버레이크 장날

메타인지적 부부싸움





온 동네 사람들이

토요일 오전에만 내뿜는

집단적 여유로움이 있다.


오전 7시에서 10시 정도까지만 유효한 이 공기를 놓치지 않으려 조용히 나선다. 자고로 이런 순간은 홀로 즐겨야 제 맛! 남편이 혹시나 따라나설까 옷도 살살 주워 입고 현관문을 살모시 닫는다. 뒷마당에 놀던 벌새들은 살모시에도 소스라치며 호다닥 전선줄 위로 줄행랑.


노곤하면서 생기 있는 이 공기는 종종 엄마 손 잡고 수수부꾸미 사 먹던 서문시장으로 나를 끌고 가기도 한다. 오랜만에 불러보는 수수부꾸미. 참 예쁜 이름. 토요일 오전에는 동네 장이 열려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가 생일날 주신 백 불을 손에 쥐고 산책 나온 김에 장날 구경을 간다. 현금을 잘 쓸 일이 없지만 이럴 때 요긴하다.


남편 말로는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생일이면 손에 백 불을 쥐어주셨다고 한다. 서른아홉이 된 아들에게도 한결같이 백 불을 주시는데 그 사람과 결혼한 나도 10년째 그 집안 전통에 참여 중이다.


백 불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아본다. 어릴 적 천 원을 쥐고 문구점에 들어섰을 때의 설렘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내 마음. 왜 안 달라졌지? 이게 뭐라고 들뜨지?


한참을 어슬렁하다 보니 사고 싶은 물건은 없고 그저 시장의 분위기에 돈을 지불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애지중지 키워낸 버섯, 보라색 컬리플라워, 유정란, 튤립 등이 한쪽에 자리 잡았고 손수 만든 목걸이, 반지, 그림도 출동했다. 다들 어른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들의 얼굴에선 ‘사람들이 좋아해 줄까’ 하는 어린이 표정이 관찰된다. 저런 표정들과 날씨가 어우러져 사는 일이 온전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찰나의 온전이다. 이 찰나 뒤에 부부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산책할 때 활짝 열려있던 마음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확 쪼그라든다.


주말이면 항상 프로젝트가 필요한 남편이 거실 구석에 있던 서랍장을 중앙으로 옮긴 것이다. 눈이 아팠다. 마음도 아팠고 갑자기 몸살이 날 것 같았다. 멀쩡하던 내 거실에 심미적 부조리가 발생했고 귀에는 사이렌이 울렸다.


남편은 집에 들어서는 나를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귀밑머리에 맺힌 땀을 스윽 훔쳤다. 슬로모션으로 닦았던 것 같다. 한 마디 칭찬 댓글을 원했던 남편을 쌩하고 지나쳐버린 나는 안방에 한 시간 정도 처박혀 현실을 부정했다. 저런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저 가구배치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10년을 살아온 내 자신이 한없이 가엽게 느껴졌다.


"This area is totally underutilized."

"이 부분 너무 휑한 거 같애."


몇 달 전 남편이 흘리듯 한 말이 생각났다. 돌아보면 예고편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남편의 저 말에 나는 세상에서 휑한 게 제일 좋다고, 제발 뭘 어떻게 할 생각 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안심하고 살던 참이었다.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나를 참다못해 구경 온 남편이 아무렇지 않은 척 운을 뗀다.


"나 거실에 서랍장 위치 바꾼 거 봤어? 어때? 괜찮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남편을 투명인간 취급한 후 화장실로 도망갔다. 남편이 화장실로 따라온다.


"대신 저 서랍장 위에는 당신 좋아하는 돌만 올려놓을까? 아무것도 올리지 말고 당신 좋아하는 것만 올리자."


죄지은 강아지 얼굴을 한 채, 악한 가구 배치를 선한 돌의 기운으로 상쇄하려는 일차원적 소년의 의도가 불쑥 연민을 자아냈다. 남편에게서 남자가 아닌 소년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무력해진다.


"나는 너를 사랑해. 그렇지만 저 서랍장 배치는 내게 폭력적이야. 그럼에도 나는 니가 저 배치를 몇 달이나 구상한 것 같으므로 그냥 둘게. 너를 사랑하니까 나는 지금 부모 마음으로 참는 거야."


"참을 게 없어. 이거 봐봐. 소파 있는 구간이 훨씬 더 넓어졌잖아."


"나도 눈이 있잖아. 나 소파 구간 관심 없는 거 몰라? 나는 작업 구간 넓은 게 우선이야. 나도 눈 있으니까 설득하지 마. “


"설득하는 게 아니라 난 이런 배치가 필요해! “


"‘필요’ 하지 않아! 나는 당신이 뭐가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도망가고 싶어. ‘필요’는 과대평가된 단어야! 차라리 그냥 가볍게 원한다고 말해! 그럼 내가 귀 열고 들을 테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 원하는 거 못해주겠어? 이 가구 배치를 정말 원해? 그럼 필요하다고 하지 말고 원한다고 말해! 그럼 나 그냥 기꺼이 받아들일게! “


"어. 원해!"


"알았어! 저렇게 해, 그럼!"


'필요해'와 '원해'가 극적타결에 도달하자 둘은 미친 듯 한참을 웃었다.


남편은 나를 설득하고 싶을 때 '필요'카드를 자주 꺼냈다. 그때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단순히 당신이 원하는 것들이기에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훨씬 마음을 열게 된다고 말했다. ‘필요'라는 단어는 실용적 가치를 심미적 가치에 우선시하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의 근거이자 수많은 부부싸움을 촉발한 원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부부싸움이 참 스스로 듣기에도 너무 하찮아 웃음이 터진 것에, 우리가 이제 하다 하다 메타인지적 부부싸움을 하는 경지에 이르렀구나 축배를 들고 싶은 완벽한 토요일. 아- 영어로 부부싸움하기 너무 힘들어ㅜㅠ 나 너무 불리해ㅜㅠ 대구말로 확 조져야되는데ㅠㅡ




검은색 면 티셔츠와
검은 벨벳치마. 그리고 옆에 파란 캔버스화 이쁨. 이분들도 동네 장 마실 가는 중.
나는 못 본 세계를 그리고 있던 한 사람. 자기 차 트렁크를 이젤 삼아 열심히 그리는 중.
남편이 좋아하는 블러드 오렌지를 살까 말까 하다가 그냥 왔다. 그냥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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