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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Jul 06. 2023

도쿄





도쿄에 있다. 


아주 오래된 호텔에 머물고 있는데 시아버지 말씀으론 내년에 허물 예정이라 개/보수에 손을 놓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관이 마음에 든다. 샹들리에도 바닥 타일도 고풍스럽다. 


한국에서의 일정은 가족행사로 휘몰아치는 나날들이라 글을 쓸 틈이 없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연희가 해 준 강된장 호박잎 쌈밥도 먹고 앵두, 오디, 보리수열매도 먹었다. 연희 장독대 근처에는 된장 고추장 간장 말고 이런 나무들도 많다. 


어제는 천왕이 산다는 집에 갔는데(imperial palace) 푸른 나무들과 성 주변으로 흐르는 녹조물이 한데 어우러져 초록의 50가지 그림자(50 shades of green)를 만들고 있었다. 


초록은 마음에 들었지만 더워서 걷는 일이 달갑지 않았다. 

땡볕에 더 걸었다간 부부싸움이 날 것만 같아 그늘진 쪽으로 산책 루트를 몰고 갔다. 나는 열에 취약한 인간인데 더운 날은 더러 인성이 열에 녹아 없어지기도 하였다. 


일본스레 깎아놓은 잔디를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안쪽에 보라색 자두 몇 알이 떨어져 있었다. 잔디밭으로 걸어 들어가 한 알을 쥐고 자연스레 걸어 나왔다. 그 자연스러움이 마치 맡겨놓은 자두 찾아가는 모양새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물병 뚜껑을 열더니 내가 주워온 자두에 쫄쫄쫄 물을 부으며 눈짓으로 살살 비비라고 말했다. 물기를 탁! 털고 한 입 깨물었다. 


새그라웠다. 

'새그랍다'는 '시다'는 말이지만 사실 신맛과 차이가 있다. 새그랍다는 말은 귤이나 자두처럼 과일이 시큼하면서 상큼한 것이 결합됐을 때 하는 말이지만 '시다'에는 상큼한 느낌은 별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내 경험치에 따른 판단이지만.


새그라운 맛은 기분 전환에 효과가 있었다. 보라 자두가 내 몸에 들어오자 30분 정도의 기분 좋음을 발생시켰고 그 상태의 종결과 함께 시원한 그늘길도 끝을 맞이했다. 


그늘의 끝자락에서 작열하는 태양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정수리에 다림질을 당하는 느낌에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순간, 벤치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물체에 눈이 갔으니 그건 바로 누군가 놓고 간 까만 우산.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이 우산에 대한 가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단체 관광객이 저기 앉아있다가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일행과 함께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그녀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 우산 하나 때문에 돌아오기엔 너무 덥고 그녀는 단체 관광객이기에 단체 행동을 해야 한다. 


여기까지 써 놓고는 마지막으로 우산을 관장하는 신에게 말했다(로마에선 로마법. 일본엔 우산신도 있으니까). 지금 내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을 때 홀수면 우산을 좀 쓰겠다고.


비장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았다.


1:11


홀수의 대표 격인 1이 세 개나 있는 것이 '어! 니 거야! 써, 써!'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우산신의 허락을 맡고 스트랩을 풀어 촤라락- 우산을 펼쳐들자 타들어가던 정수리가 진압되었다. 땡볕 아래 우산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는데 남편이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이리저리 나를 2시간이나 끌고 다녀도 얼굴에 미소가 유지되었다. 




일본 맨홀 뚜껑이 예뻤다. 새그라왔던 보라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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