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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Sep 28. 2023

금지된 물구나무




내일의 나는 과연 치과에 가 있었고, 리셉션에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 (fiddler on the roof, 1974)'에서 본 듯한 할머니가 적당히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유대계 미국인들이 운영하는 곳으로 보인다.


남편은 유대계 의료기관을 신뢰한다. 자기 주치의도 유대인이고 직장도 유대계 학교. 이런 성향은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이 유대계 미국인이었음에 기인한다.


이 리셉션 할매를 보자 한참 통역하던 시절, 이스라엘 학계 주요 인사 방한 일정을 수행했던 기억이 났다. 히브리대학 총장이 외교부 초청으로 방한하여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공관 차석, 참사관이 함께 동행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그들이 일하는 방식엔 여타 방한 인사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었다 (일단 초청 인사의 해당 국가 대사관에서 동행하는 경우가 처음이었고, 똘똘 뭉쳐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음).


그들은 한국인들이 말하는 '눈치'(혹은 그것의 순기능)가 뭔지 아는 것 같았고, 진지한 가운데 유머 감각이 있었다. 일부 미국인처럼 자기가 농담해 놓고 자기가 먼저 웃는다던지 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며, 실없는 소리를 잘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그들이 지닌 '모든 것에 대한 적당함'이 근사하게 느껴졌는데, 치과 리셉션 할매의 적당히 환한 미소를 보자마자 그들이 바로 떠올라 언급해 본다. 




접수를 마치고 대기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기다린다.


리셉션 할머니와 한 환자의 스몰톡이 길게 이어졌다. 이 환자는 오랜 기간 이 치과에 다니다 콜로라도로 이사를 가는 모양이다. 그들의 스몰톡으로 인해 내 기다림은 늘어나지만 그냥 그들의 대화에 젖어들기로 한다. 가만 들어보니 재밌다. 연초에 다녀온 콜로라도 여행도 생각난다. 한참 빠져서 듣고 있는데 접수데스크 너머로 누군가 소리쳤다.


"네에?! 지금 세 시간째 뺑뺑이 당하는 중인데 또 다른 부서로 연결하겠다고요? 여긴 의료기관입니다. 의료기관의 응급 상황에 이런 식으로 대처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나는 제발 저 화난 할매 목소리가 내 치과 의사가 아니길 기도했다.


"환자분 들어오세요."


리셉션 할머니는 나를 진료실로 안내하며, 한결 강화된 미소로 찡긋 웃었다. 소란스러운 상황을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화난 사람은 내 담당 치과의로 드러났고 자기 핸드폰을 진료대까지 들고 와서 AT&T 고객센터와의 전화를 단판 지으려 했다.


나는 이 상황이 웃기기도, 기분 나쁠 법도, 예민한 사람은 인종차별 운운 할 법도 했지만 세 시간째 뺑뺑이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버린 이상, 이미 이 할매 편에 서 있었다. AT&T의 뺑뺑이를 당해봤기에 그 참을 수 없는 열받음이 자동 공감되었던 것이다.


치과의사는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온 정신은 전화에, 시선을 나를 향한 채 나에게 입을 벌려보라고 하였다. 나는 설마 통화하면서 진료를 하려나 싶어,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통화를 먼저 끝내세요. 기다릴게요."


할매는 재차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하며 전화기에 대고 곧 소송할 기세로 강력한 한방을 날리곤 통화를 종료했다.


"에효... 미안해요. 이게 사실 3일 전부터 이어지던 문제라 끊을 수가 없었어요."


"3일이요? 세상에... AT&T 저도 당해봐서 알아요. 저는 한국 살다왔는데 한국 같으면 저런 서비스 상상도 못 할 일이거든요. 미국에 처음 와서는 정말 힘들어 죽을 뻔했다니까요!"


"당해보셨구나... 그나저나 정말 미안해요. 기다려줘서 고맙고요. 어제 남편분이 어금니가 부었다고 하신 것 같은데 여긴가요?"


할매는 정성스런 손길로 진료를 시작했고, 엑스레이를 보더니 알 수 없는 충격에 의해 어금니 뿌리에 금이 갔다고 했다.


알 수 없는 충격이 뭔지 나는 알 수 있었고, 곧 물구나무서기에 대한 고백이 이어졌다.


"당분간 물구나무서기는 절대 하시면 안 됩니다. 통증은 곧 사그라들 거예요. 그래도 항생제 끝까지 다 드셔야 해요!"


"네. 근데 뿌리가 금이 가도 안 아프면 그냥 살아도 되나요? 혹시 다시 붙을 수도 있나요?(붙을 수 있다고 말해줘요, 어서!)"




산책하다 이런 광경을 보면 가슴이 찢어짐ㅜㅠ 꽂힐 곳을 잃어버린 모양새가 내 어금니를 닮았다.
땅바닥 에어팟의 슬픔을 지워낼 꽃 사진: 나 혼자 부케꽃이라 부르는 꽃인데 송이마다 색이 다양해 볼 때마다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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