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ilience
비 온다.
캘리포니아가 비를 맞으면 어딘가 안 돼 보이는 구석이 있다. 항상 쨍긋 웃는 사람의 우울이 더 파란 것처럼. 물론 나는 비를 좋아하지만 오늘 아침엔 해가 보고 싶었다. 어젯밤 하나의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1983 - 2023
L'époque du porc (돼지고기 시절)
하나의 에포크(시절)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절이라고 해도 될 것을 에포크라고 쓴 이유는 그것이 한 개인의 먹는 역사에 있어 벨에포크(혹은 호시절)였기 때문이다.
여섯 살 무렵 돼지수육을 처음 먹었던 날.
소나 닭을 가뿐히 능가하는 풍성한 기름의 향연. 비계가 적당히 붙어있는 살코기를 한점 입에 물고 오물오물하자, 입안 가득 쫜-득한 고소함이 코팅되었고, 나는 이제 다른 고기 안 먹고 돼지고기만 먹겠노라, 그것도 비계 많은 부위로 먹겠노라 다짐했던 것이다.
인생이 어디 맘먹은 대로 흘러가던가.
어제부로 나는 돼지고기 못 먹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올 초에 눈치를 챘지만 모른 척하고 버텼다. 돼지고기를 먹은 날이면 배가 아픈 일이 여러 번 겹쳤는데 그때마다 우연이겠거니 넘기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어제, 도저히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정황으로 인해 인정하게 되었다.
적지 않은 슬픔이 밀려온다. 이건 돼지고기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제 돼지고기를 밀어내는 내 몸의 여타 변화에 관한 것이기에.
날이 추워졌다고 어깨가 시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 올해 처음 그리 느꼈다.
넘어져서 어디 삐끗하면 회복이 더뎌진 것. 손가락에 까시래기를 떼낸 자국이 점이 되어버린 것(이건 좀 충격). 오늘 아침에는 갑자기 왼쪽 새끼손가락이 미세하게 저렸다.
'이건 또 뭐야. 저릴 짓을 하나도 안 했는데 왜 저려?'
괜히 울적하고 이러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저림이 어깨 등 팔다리로 다 퍼질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렇다고 '나 이렇게 힘들어요...'라고 마무리 짓기엔 너무 재미가 없으므로 배경음악을 바꿔 본다.
나는 우울감이 올라오면 일분동안 진하게 그 우울을 바라보다가 툭 털고 설거지나 청소를 한다. 툭 터는 방법은 내 손이 먼지떨이라 생각하고 가슴을 실제로 '툭툭' 치면서 털어낸다.
이럴 때를 대비해 항상 설거지 거리와 청소 거리를 남겨두는 편이다. 툭 털기 해야 하는데 청소가 말끔히 되어있거나 싱크대가 말갛게 정리된 것만큼 절망적인 일도 잘 없으므로. 맨손으로 무념무상 따뜻한 물에 설거지를 하다 보면 파랑색 기분이 빨강색 온수로 변한다.
어려서 여행하면서 툭 털기 연습을 하도 했더니 툭툭 잘 터는 편이다. 어떤 교수님이 회복탄력성이라는 말을 쓰는 걸 봤는데 잘 들어보니 내가 하는 툭 털기와 좀 비슷한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이룬 가장 큰 성취가 뭔가요?'라고 묻는다면 초예민자로 태어나 우울로 잘 빠지는 기질에 지지 않은 일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