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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Mar 13. 2024

빛을 기록하는 법

모험




"아찌, 근데 모험이 뭐야? 재밌는 거야?"


"어. 쪼끔 무서운데, 재밌는 거야."


"무섭다고?"


"어. 근데 아찌랑 같이 가면 괜찮아, 하기 싫음 말고."


"아니야, 할래! 나 모험할래!"


연희 동네에는 계곡도 있고 들판도 있어서 모험 떠나기 좋았다. 그런 동네를 두고 모험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명절에 우르르 모이는 날이면, 나는 부지런히 조카들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온통 신난 얼굴로 손에 손잡고 출렁출렁 걷다 보면 우린 집단 하이(high, 고양감)에 도달하여, 살짝 미친 사람들처럼 행복했다.


누가 뭔 말을 해도 웃겼다. 공기가 이미 웃겨지면 손을 쓸 방도가 없다. 이런 식으로 함께 미쳐 본 관계는 평생 서로를 그리워한다. 꼭 육친 관계일 필요는 없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누가 나를 웃겨주면 그게 너무 유의미해서, 오래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육친 관계도, 사실 독서마저도 나는 인간들끼리 우정을 나누는 일로 바라본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내가 장자를 읽으면 그가 나를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열여섯 살 때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희를 연희라 부르는 이유다. 나는 내게 생명 준 연희와의 우정이 가장 두텁고, 그곳을 중심으로 다른 우정들이 뻗어 나간다. 그리고 모든 우정은 독자적으로 아름답다.


특히, 어린 생명들과의 우정은 커다란 고양감을 불러일으킨다. 신의 은총이다. 자꾸 다가가서 누릴 일이다. 고양감이라는 단어는 모른 척 하기엔 너무나도 고양이를 닮았다. 참고로 고양이도 굉장한 고양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고양된 우리는 위험한 곳으로도 빠지기 일쑤였지만, 어디서 어떻게 빠졌는지는 언니들에겐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다들 너무나 훌륭하게 자라 주었고, 자라고 있다. 그럼 됐다.


언니들이 알아도 될 법한 모험의 현장 하나를 공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멀쩡한 길 놔두고 계곡 돌다리를 건너니, 제 키 만한 풀숲이 나타난다. 앞사람이 튕긴 풀에 맞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서 통과하자, 바로 해캄 구간이다. 종아리를 휘감는 오묘한 불쾌감에 어린 조카가 울음을 터트리고, 모래 속에서 누군가 작은 조개를 발견한다. 그걸 본 울던 아이는 옷소매로 눈물을 급히 훔치며, 자기도 모래 속으로 손을 집어 넣기 바쁘다. 최초 발견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찌! 이거 그거 아니야? 뽀얗고 정구지 들어간 조갯국 있잖아, 그 조개 아니야?"


갈색 줄무늬가 예쁘장한 재첩이었다. 모래밭에서 재첩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조카들은 찬란하게 웃었다. 마침 해가 저물면서 대지에 흩뿌려진 금가루가 웃는 얼굴들에도 내려앉았다.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장면을 두고두고 그리워할 것임을. 나는 급히 내 눈의 조리개를 최대치로 열어, 거기 있던 모든 빛을 쓸어 담았다.


이런 식으로 남겨진 빛의 기록은 내 몸 곳곳에 돌아다니다가 허공꽃으로, 꿈으로, 가끔 눈부신 날 해변에서 몽상으로 재생된다. 그러면 나는 또 고양된다. 


고양이 잘 되는 편이다. 예민해서 득 볼일이 있다면 이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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