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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Apr 17. 2024

근원적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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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값


벽지놀이가 재밌었던 어린이 시절. 그 재미의 중심부에는 자유함과 외로움이 혼재했다. '인생은 왜 외로울까?' 할 때마다 땡땡이 무늬는 괴물로 변했고, '인생은 그냥 외로운 거야!'라고 선언해 버리면 괴물이 사라지곤 했기에 편의상 후자 쪽의 생각을 자주 했고, 그렇게 외로움이 삶의 전제로 깔리자 기적이 일어났다.


인생은 외로운 건데, 오후가 되면 언니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또 인생은 외로운 건데, 저녁이 되면 부모님께서 일터에서 돌아오셨고, 그 다음 날도 어김없이 돌아오셨다. 하루종일 흩어져 있던 우리는 저녁이 되면 연희가 호다닥 만들어 낸 반찬들을 먹으며 따뜻하고 행복했다.


연희는 반찬을 다 만들고 나서 생색 내기를 좋아했다. 매번 자신이 얼마나 빨리 여러 가지 반찬을 잘 만드는지에 대해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것도 마치 생색 처음 내 보는 것처럼 신나게. 들을 때마다 나는 웃겼지만 연희는 진지했다. 진심으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뿌듯해하는 것 같았고,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는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연희가 그렇게 반짝이는 엄마였지만 그래도 인생은 인간이라서 외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점점 커 가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나 만큼, 대부분 훨씬 더 외롭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걸 알게 되자 나는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에 꽂히기 시작했다.


우린 각자의 사정이 있는데 내 사정은 나 밖에 알 수가 없다. 어느 정도 '그렇겠거니...'는 가능하지만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연희와 나는 한 몸이었던 적이 있을 만큼 가까운데도 연희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너와 나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알 길이 없다는 것이 외로움의 원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외로움의 문제를 바라보다 보다 갑자기 알게 - 혹은 정리하게 - 되었다. 내가 '외롭다'라고 할 때의 진원에는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근원적 컨디션이 존재하며, 내가 손 써볼 일이 아니라는 것. 내가 나라는 개체성에 힘을 실어줄수록 외롭게 존재하고, 내 안의 보편미,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것을 바라볼수록 충만하게 ‘있다’는 것.


속에서부터 차올라 넘치는 기쁨이 실재한다는 것. 이 상태야말로 기본값이라는 것. '항상 기뻐하라'는 굉장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구절이며, 그 상태에서는 남의 사정을 모르고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이 된다는 것.


살면서 느꼈던 가장 근원적 감정, 외로움. 지금도 어디 안 가고 잘 모셔져 있다. 다만, 이제 인간은 혼자 있어도 혼자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나, 그리고 상황과 역할에 따라 적절히 꺼내놓는 다양한 나. 그 모든 나를 가장 깊은 나에 의지하여 관리한다.


어제 나는 붓을 들고 무대에서 글씨 쓰는 나로 존재했다. 집에서 혼자 쓰듯이 고요하게 대붓을 쥐고 캔버스에 슥슥 그었다. 그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 자연스러워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나와 내가 만나 자연스럽다 느끼면 꽉 차는구나. 이런 짓을 자주 해야겠구나.'생각하다, 무대 인사도 잊은 채 퇴장해 버렸다. 내 이름이 다시 불렸지만 나가지 않았다. 그저 박수 소리를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



글쓰기와 글씨 쓰기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퍼포먼스를 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물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비본질적 움직임, 혹은 겉멋적 요소에 대한 참을성이 현저히 줄어든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공개된 공간에 일기 형식의 글을 쓰면서 속도가 붙은 변화로 보인다.


나는 퍼포먼스 초청을 받고,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그 순간부터 퍼포먼스를 시작하는 편이라, 어제의 퍼포먼스는 2주 전 멤피스 국제공항에서 시작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몸짓을 할 수 있다는 감사, 환희, 이런 감정에 몸을 푹 담그고 있다 보면 어떤 흐름으로 붓을 움직여 나갈지에 대한 대략적 시나리오를 얻게 된다. 그걸 바탕으로 하이킹하면서, 차 타고 이동하면서, 샤워하면서 자꾸자꾸 혼자 쇼를 하는 것이다.


대붓으로 획을 찍어 누르고, 긋고 삐치는 모든 움직임은 자칫 방심하면 과함으로 흐른다. 그래서 속으로 굉장히 눌러줘야 보는 사람이 편안하다. 대붓은 무대에서 가만 들고만 있어도 자체적으로 뿜는 물리적 위엄이 있기에 그것에 대항할 만큼만 솟구치는 신명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전엔 신남을 누르는 힘이 약해서 사람들 많이 오글거리게 했는데, 드러냄의 정도에 대한 감각이 공개적으로 글을 쓰면서 미미하게나마 향상되었다. 물론 아직 멀었다.


속으로 누른다는 게 자기검열의 결은 아니고, 그저 본말이 조금 더 잘 보이게 된 것 같다. 지난주에 지산겸괘를 보다가 공자가 그 괘상에 붙인 말 중에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손잡이가 없는 물건이라 어디도 쓰일 수 없다'는 말을 접하고, 진짜 너무 웃기고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이 넘으니 슬슬 손잡이 없이 살아온 세월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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