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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Apr 27. 2024

리씨와의 대모험

리씨는 여섯살이다. 새카만 피부에 허스키한 목소리, 통통한 사지를 휘두르며 집안을 돌아다니다 한번씩 고양이들이 말썽을 피울 때면 고함을 친다. 살면서 누군가 고함 질러 멋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은 국기원 통역하러 갔다가 본 시범단 고함 소리랑, 페기 구 '흥부' 인트로에 나오는 판소리 명창의 '흥부야!' 정도가 다였는데, 그 다음 주자가 리씨.


"GRACIE!"


"BUTTERS!"


대문자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고양이는 제 자리에서 한번 붕 치솟았다가 각자의 처소로 줄행랑친다. 웃긴 건 이 고양이들이 밤만 되면 리씨 방으로 기어 들어가 잔다는 것. 근데 왜 그러는지 알 것 같다. 리씨는 어진 사람이다.


사실 개기일식 보러 가기 전 주에 시댁에 있었는데, 리씨와 패들보드를 타다가 식겁한 일이 있었다. 리씨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외숙모(아찌)가 와서, 안 그래도 신나 죽겠는데 단둘이 패들보드에 올라타자 흥이 폭발해버렸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This little light of mine~ I'm gonna let it shine~"


유치원에서 작년 크리스마스 발표회 때 배운 노래였다. 단전에서 올라오는 신남이 허스키한 애기 목소리로 터져나왔다. 리씨는 노래에 소질이 없지만 마음을 다해 부르므로 감동이 있다. 물 위에서 우리 둘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패들보드 위에서 앉은 채 엉덩이를 들썩이며 둥둥둥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조립식 패들의 밑 부분이 물에 툭 떨어지면서 우리가 타고 있던 보드와 급격히 멀어져갔다. 내 손에 남은 건 1미터 남짓한 스틱 뿐. 혼자였다면 바로 엎드려 누워 손바닥 패들링으로 낚아 채 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앞에 통통한 리씨가 타고 있어서 그 자세를 취할 수 없었다. 물 한가운데서 패들이 없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하필 그날 내 보드에 애기가 타고 있다니... 나는 3초 정도 정신이 나갔다가 마음을 다잡고 고요한 표정으로 리씨를 바라보았다.


"리씨, 잘 들어. 우리 지금부터 노래 그만하고 모험 할거야. 알았지? 저기 위에 데크 보이지? 저기까지 우리 패들링 안 하고 바람만 느끼면서 가는거야!"


마침 바람이 호수 공원 반대편 데크 쪽으로 불고 있었다. 리씨는 패들이 없어 내가 살짝 당황한 것을 눈치채고 울랑말랑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씨! 우리 어제 레고로 고가다리(overpass) 만들었잖아! 근데 높이가 들쭉날쭉해서 만들다가 자꾸 망가졌는데도 끝까지 잘 했잖아! 끝까지 잘 하려면 뭐가 필요하다고 했는지 기억 나?"


"응! 침착하게 하는 거!"


"맞아! 우린 지금 패들이 없지만 바람이 저쪽 데크로 우리를 데려다주고 있으니까 괜찮아. 침착하게 조금씩 외숙모가 손으로 패들 만들어서 이렇게 방향만 가끔 잡아주면 되니까 리씨는 가만 앉아 있어, 알았지?"


"응!"


데크 쪽으로 점점 도착은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호화 콘도 컴플렉스가 있었는데 데크도 사유재산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동네 산책하다 보이는 "private property, armed response(사유 재산, 침입시 무장 대응)" 팻말이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쳤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고, 노래 부르며 신나게 흔들던 순간이 전생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데크에 패들보드가 닿아 찬찬히 살펴보니 콘도와 적당한 거리가 있었고, 공공재의 느낌이 났다. 얼른 리씨를 데크에 앉히고 나도 올라가 패들보드를 끌어 올렸다.


순간 집 주인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데크로 나왔다. 아빠, 엄마, 아장아장 걷는 애기 한명. 내 입은 자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혹시 이 데크가 사유 재산인가요? 그렇다면 정말 미안해요. 보시다시피 우리가 패들링하다가 패들을 놓쳤어요."


"많이 놀랬겠어요! 괜찮아요? 여긴 제 친구 집이니 걱정마시고, 가족들 계신 곳이 어디에요? 차로 바래다 줄게요!"


"아, 아니에요 그건 너무 큰 신세고, 전화 한번만 써도 될까요?"


"그럼요."


막상 남의 핸드폰을 손에 쥐자 남편 전화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번호를 하나씩 눌러 통화해 본적이 없어서다. 암만 그래도 남편 전화번호 모르는 게 말이되나 싶은 순간, 내 번호와 비슷하다는 걸 기억해내고 하나씩 꼭 꼭 눌러본다.


신호가 울리고 남편은 받지 않는다. 야속하다.


"남편이 안 받네요. 죄송한데 여기 패들보드 잠시만 놔 두고 가도 될까요? 제가 남편 데리고 올게요."


"물길로는 금방 오셨겠지만 걸어가면 멀어요. 사양 마시고 제가 태워드릴게요, 저는 제이(Jay)라고 해요. (아내 쳐다보며)당신 애기랑 잠깐만 있어!"


정말 미안하고 고맙고 황송해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진짜 이런 사람 안 만났으면 어쩔뻔했나 등에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너무 고맙고 민망하고... 어떻게 보답을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I'm so grateful and embarrassed about the whole situation, I don't know how I should repay you.)


어떻게 '보답'을 해야될지 모르겠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듣고 놀란 눈으로 리씨가 말했다.


"외숙모! 이 분한테 돈 줄 거예요?"

(Auntie Jiyoung! Are you gonna pay him!?)


"아니,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단 말이야."

(No Lisey, it's just an expression you use when you feel so grateful and can't find a word.)


"그럴 땐 그냥 '고맙습니다.' 어때요?"

(Well, how about a simple 'thank you?')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리씨 덕에 어색했던 차량 속 공기가 폭소로 채워졌다. 목소리가 크고 허스키해서 더 웃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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