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tleman》 The Afghan Whigs
《Nevermind》의 글로벌 히트는 메이저 레이블들이 눈에 불을 켜고 제2의 너바나 또는 그런지/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을 찾게 만들었다. 당시 주어는 시애틀이었고 주석은 서브 팝Sub Pop Records이었다. 아프간 휘그스The Afghan Whigs도 그 절박한 레이다망에 포착된 밴드 중 하나다. 비록 시애틀이 아닌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출신이긴 했어도 이들은 서브 팝에서 《Up in It》과 《Congregation》, EP 《Uptown Avondale》로 자신들을 증명했고, 너바나의 빅뱅 이후 무려 열두 곳 이상 번듯한 레이블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일렉트라Elektra Records도 그중 하나였다.
일렉트라는 규모가 작을 뿐더러 소속 아티스트들 명단도, 레이블 역사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CEO였던 밥 크라스노우Bob Krasnow 역시 좋은 사람이었던 데다, 그가 킹 레코드King Records에서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함께 일한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렉 둘리Greg Dulli, 보컬/리듬 기타/프로듀서
《Gentleman》은 그 아프간 휘그스의 4집이자 메이저 데뷔작이다. 밴드 이름이 조금 독특한데, 반사적으로 연상되는 나라 이름아프가니스탄이나 정당명휘그당-Whig Party과는 큰 관련이 없다. ‘아프간’은 미국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직 담요를 가리킬 뿐이고, ‘휘그스’는 단어가 지닌 어감 때문에 썼을 뿐이다. 그렉에 따르면 멤버들이 ‘갱gang’처럼 들리면서도 독특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이름을 원한 끝에 선택한 밴드명이라고 한다. 팀의 사운드를 설명해주는 동시에 살짝 전복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게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다.
그렉 둘리는 밴드 역사상 가장 많은 공연을 한200회 콩그리게이션Congregation 투어 중에 이 앨범을 만들었다. 길 위에서 만들었다는 것인데, 플로리다 이버 시티Ybor City에서 산책 중 떠오른 리프와 가사를 쓴 <Gentleman>이나 웨스트 할리우드West Hollywood에 있는 실제 교차로에서 제목을 가져온 <Fountain and Fairfax> 같은 곡들이 그 예이겠다. <Fountain and Fairfax>는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친구를 따라 그렉이 갔던 감리교회에서의 경험을 쓴 노래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우울한 기분에 자기 위로 차원에서 연주한 기타가 창작의 계기가 된 4집 수록곡들은 모두 녹음 전 라이브 무대에서 시도해본 곡들이었다. 이들은 펄 잼Pearl Jam을 연상시키는 개성 만점의 칵 록cock rock을 쏟아내며 “아메리칸 뮤직 클럽American Music Club조차 당황하게 할 만큼 과잉된 반인륜적 불안을 내뿜는 밴드”로 평가받았는데, 그 중심엔 “독특하게 사악한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그렉 둘리가 있었다.
너바나 현상을 타고 메이저에 입성했지만 정작 《Gentleman》에서 아프간 휘그스는 너바나나 머드허니Mudhoney 같은 서브 팝 대표 밴드들이 즐겨 했던 슬러지Sludge 기타에서 벗어난 음악을 지향했다. 대신 밴드는 소울 어사일럼Soul Asylum 풍 컨트리 발라드나 허스커 두Hüsker Dü의 《Zen Arcade》의 느낌을 가져왔다. 한편으론 이들이 구사하는 “피아노와 멜로트론, 첼로와 슬라이드 기타로 단련된 밀도 높고 교향곡에 가까운 사운드”는 사운드가든과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만남, 그 이상의 성과를 들려준 것으로도 여겨졌다.
수치심, 죄책감, 절망, 속임수, 집착 등 어둡고 극적인 욕망의 늪에 빠져드는 남녀 간 전쟁을 밀도 있고 고양된 록으로 담아낸 간과된 걸작.
리차드 크로멜린Richard Cromelin, 록 평론가
《Gentleman》에 대한 리차드의 평가는 타이틀 트랙 <Gentlemen> 뮤직비디오에서도 엿볼 수 있고, 사진작가 낸 골딘Nan Goldin의 유명한 작품 『뉴욕에서 침대 위의 낸과 브라이언Nan and Brian in Bed, New York City』을 연상시키는 앨범 재킷 사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골딘의 사진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그렉은 쓰라린 이별 후 죄책감, 분노, 감정적 혼란으로 가득 찬 《Gentleman》에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로맨틱 판타지 영화 『마음의 저편One from the Heart』(1981) 같은 분위기를 더하고 싶어 해당 사진의 변주 버전을 앨범 대문에 걸었다고 했다.그렉 둘리는 신시내티 대학교 영화과 중퇴생이다. 즉 배경 지식 없이 보면 자칫 ‘부적절한 섹슈얼리티’에 연관지을 수 있는 저 사진은 “유해하고 고장 난 관계와 잃어버린 순수함”이라는 앨범 주제에 맞게 신중히 연출된 이미지였다. 특히 사진 속 우울한 노란색과 주황색 조명은 “방어력 없이 상처받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4집 작업을 하며 그렉은 ‘분위기로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미국 록 밴드 드림 신디케이트The Dream Syndicate의 특징, 즉 슬픈 가사를 통한 공감과 마이너 키, 어둠의 이미지 등을 작품에 녹였다. 《Gentleman》 발매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던 그렉은 “90년대 남성의 어두운 정신세계를 얼만큼 깊이 파고들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론 첫 곡 <If I Were Going> 가사를 조용한 바에서 이야기 하듯 좀 더 명상적인 방식으로, 서곡처럼 차용하는 식이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도입부로서다.
오프닝은 <If I Were Going>이 맡았지만 앨범을 위해 처음 쓴 곡은 <What Jail Is Like>였다. 슬프고 화가 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속으로 타인을 탓하는 내용이다. 이 분위기는 <My Curse>로 이어지는데, 그렉이 당시 실제 겪었던 소송을 다룬 곡이다. 당사자 마음이 쓰라렸는지 그는 마이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으니,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출신 인디 록 밴드 스크롤Scrawl의 마시Marcy Mays-보컬/기타가 그 역할을 맡았다. 스크롤의 데뷔작 《Plus, Also, Too》 때부터 팬이었던 아프간 휘그스 멤버들은 저들의 <Green Beer>를 커버하기도 했다. “스튜디오에서 내가 직접 디렉팅을 하려고 했다. 마시는 그런 식으로 몇 차례 시도 끝에 나더러 밖에서 점심 먹고 너 할 일 하라고 말하더니 모든 감정 연기를 스스로 해내보였다.” 그렉의 디렉팅을 거부하고 그렉의 감정에 완벽히 빙의한 마시의 ‘열연’을 담은 <My Curse>는 <When We Two Parted>와 함께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인 곡으로 남았다.
앨범에서 가장 싱글 성향인 <When We Two Parted>는 밴드 리더 그렉 둘리의 음악 취향을 드러내는 트랙이기도 하다. 그렉은 록 밴드를 하지만 그는 어셔Usher와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Strawberry Swing>을 좋아하는 프랭크 오션의 팬이기도 한 그렉은 자신의 밴드와 프랭크의 <Love Crimes>도 커버했다. 알앤비와 랩 음악에 진심인 그렉은 <When We Two Parted>를 바로 저 <Strawberry Swing>에 매시업Mashup-서로 다른 곡을 조합해 새로운 곡을 만드는 것 해 불렀다. 그 이전엔 로린 힐의 <Ex-Factor>에 매시업 했고, 이후엔 드레이크의 <Over My Dead Body>에 붙여 불렀다. 블랙 뮤직에 대한 그의 관심은 <If I Were Going>과 공유하는 <Debonair>의 기타 리프가 잭슨 파이브의 <I Want You Back>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란 사실과, 문제의 소지가 있던 <Be Sweet>의 도입부 가사를 두고 그렉이 “<Cop Killer>와 <Straight Outta Compton><Cop Killer>는 헤비메탈 밴드 바디 카운트의 곡이고 <Straight Outta Compton>은 힙합 그룹 N.W.A의 데뷔작 타이틀 곡이다에 비하면 건전한 편이었다”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다.
《Gentleman》을 녹음한 아덴트 스튜디오Ardent Studios는 빅 스타Big Star, 지지 톱ZZ Top, 레드 제플린, 프라이멀 스크림 등이 녹음한 곳으로, 스튜디오엔 부커 티Booker T. Jones가 <Green Onions>에서 연주한 오르간이 있었다. <I Keep Coming Back>에서 타이론 데이비스Tyrone Davis처럼 노래한 그렉은 같은 곡에 저 오르간을 초대했다. 영화의 엔딩 스코어 같은 <Brother Woodrow>와 함께 <Now You Know>의 서사를 잇는 <I Keep Coming Back>은 그렉이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거의 의식적으로 듣던 노래였다. “이전의 폭력에 대한 대위법처럼 느껴졌다. 달콤하고 솔직하고, 연약했다.” 이처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된 분위기와 정서로 듣는 이의 감정을 조용히 정복해나가는 《Gentleman》을 듣고 리차드 크로멜린은 밴 모리슨의 《Astral Weeks》가 지닌 통일감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