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옵뮤 외전: 여름방학 에디션> 잔나비
아티스트는 브랜드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이들은 남들과 다른, 자신들만의 것을 어떻게든 만들어 내야 한다. 감상하는 이들이 스치기만 해도 만든 사람을 떠올려야 그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아티스트가 된다. 그게 아티스트의 살 길이고 살아내야 하는 길이다. 잔나비의 브랜드는 무엇일까. 최정훈의 달콤한 목소리? 달달한 멜로디와 독창적인 노랫말? 레트로 정서에 기댄 감성? 시공간을 넘나드는 뮤지컬 또는 동화 같은 이야기? 가끔씩 증폭과 디테일로 승부하는 과감한 편곡? 하나로만 규정지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예술가로서 덕목은 아니겠다. 분명 저 모든 것이 어우러져 지난 10년 간 ‘잔나비표 음악’을 만들었을 터. 편안하고 맑고 잔잔하게, 그러면서 때론 웅장하게 부풀어 오른다. 잔나비의 브랜드는 진행과 완성이 동시에 이뤄져 왔다.
아, 하나 더. 긴 제목이다. 만든 측에선 그저 관심받기 위해 그랬다지만, 어쨌거나 전략은 유효했다. 사람들은 길게 쓴 제목에 주목했고, 긴 제목은 잔나비의 색깔이 된다. 무려 마흔 두 글자로 쓴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는 그 정점이었다. 지난봄 발표한 ‘사운드오브뮤직 pt.1’의 외전을 전제한 이번 신곡 ‘사람들은 다 그래 맛있는 걸 먹을 때와 여름의 바닷가에서는’은 그보단 짧지만 여전히 길다. 같은 계절을 다른 무드로 펼친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정도의 느낌이다. 저 제목은 두 멤버가 바닷가에서 나눈 가벼운 대화에서 건졌다고 한다. 가사를 보면 그 내용이란 사람이 얼굴을 찡그리는 이유이고, 보일 듯 말 듯 사랑 감정을 심어 놓은 나머지 노랫말은 이 노래를 ‘여름 찬양송’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였다. 이번에도 잔나비의 긴 제목은 먹히는 분위기다.
‘사람들은 다 그래 맛있는 걸 먹을 때와 여름의 바닷가에서는’은 싱글이다. 그리고 그 곁엔 커플 마냥 한 곡이 더 있다. 길진 않지만 역시나 독특한 제목인 ‘선샤인코메디클럽’은 과거처럼 미는 곡과 덜 미는 곡 개념을 함축한 비사이드(B-side)가 아닌, 앞 곡과 동등한 무게감으로 자리했다. 곡들은 똑같이 힘을 빼고 더 쉽게 가되 팀의 고유 정체성도 지키리라는 근래 잔나비 음악의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데, 이는 지난 4집 리뷰에서 썼듯 “대중도 납득하고 본인들도 만족하는 음악”을 두 번째 파트에서도 들려주겠다는 의지로 나에겐 읽혔다.
잔나비는 신곡들에 모두 뮤직비디오를 첨부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일반인들의 일상을 기록한 디지털캠코더로 찍은 뮤비들은 잔나비가 강박에 가깝게 집착하는 희뿌연 레트로 향수로 가득하다. 옷차림, 조명, 멤버들의 몸짓과 표정, 심지어 소리의 구조까지 영상 내 모든 것들이 90년대와 2000년대 위를 맴돈다. 그 안엔 ‘여름방학 에디션’이라는 말을 굳이 싱글에 붙인 저의를 수긍할 만한 자유로움과 한가함이 있다. 대충 찍은 듯 보여도 그 ‘대충’ 속에서 치밀하게 연출된 여유, 유머 코드가 파도처럼 느린 셔플 리듬에 얽혀 고막을 적신다.
앞 트랙의 노랫말(“여름 해 난 당신의 팬클럽”) 뉘앙스를 몰래 가져온 ‘선샤인코메디클럽’은 언뜻 매튜 매커너히가 주연한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내용 상 딱히 접점은 없다. 닮은 건 제목의 라임(rhyme) 정도다. 이 곡은 영상도 사운드도 1960년대를 겨냥했다. 구체적으론 벤 E. 킹의 ‘Stand by Me’ 정도를 떠올리게 하는 연주와 그루브, 톤이다. 두툼한 베이스 라인이 이끌고 눈부신 키보드와 보컬 코러스, 브라스가 받쳐주는 그 정서는 마냥 정겹다. 특히 뮤비에서 앞 트랙이 댄일렉트로(Danelectro) 12현 기타와 일몰 이미지로 대표됐다면, ‘선샤인코메디클럽’ 뮤비의 핵심 이미지는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다. 이는 나른하고 시원한 여름을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노래 후반부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중창 구간은 그 이미지의 음악적 묘사요, 이후 공연에서 팬들이 작심하고 따라 부를 떼창 파트로 들린다. ‘사옵뮤 외전: 여름방학 에디션!’에 수록된 두 곡은 뮤비와 함께 보면 더 즐거울 음악이다.
이렇게 계절에선 여름, 하루 중엔 밤을 좋아하는 잔나비의 감성이 하나 더 기록됐다. 3년 전 두 번째 소곡집을 떠올려 볼 때 본편과 외전의 다음 이야기는 어쩌면 2026년 봄에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현실에서 은하를 바라보았던 파트 1의 우주적 기세가 파트 2에선 또 어떤 상상으로 펼쳐질지. 팬들의 조바심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