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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985] 멜빈스와 블랙 플래그

by 김성대

1983-1985


미국의 하드코어/펑크는 빠른 스피드로 유명했지만, 84년 무렵 버즈 오스본Buzz Osborne이 느리고 헤비한 리프를 쓰기 시작하며 상황은 바뀌었다. 이 장송곡 같은 음악은 미국 북서부 그런지의 시초가 되었다.

크리스 노보셀릭


언젠가 멜빈스 공연장에서 커트를 만나 내가 《Bleach》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들이 너바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밴드라고 보면 돼요.’ 너바나는 멜빈스 만큼 사운드가든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헤비 록을 하면서도 자동차나 파티, 여자에 관한 노래로 바보처럼 굴지 않았기 때문이다.

킴 테일Kim Thayil


1983년 여름. 커트는 몬테사노의 쓰리프트웨이 마켓Thriftway Market에서 “짧은 머리를 한 상자 나르는 직원”이 나눠준 전단지를 받았다. 전단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더 뎀 페스티벌The Them Festival. 내일 밤, 쓰리프트웨이 뒤쪽 주차장에서.’ 호기심이 생긴 커트는 밴을 타고 몇몇 술꾼 친구들과 공연을 보러 갔다. 커트의 일기에 따르면 그날 무대에 선 밴드는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앨범이 들려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강렬한 에너지를 담아 연주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었다. 아, 펑크 록.” 밴드명은 멜빈스. ‘멜빈스’는 전단지를 나눠준 로저 ‘버즈’ 오스본Roger ‘Buzz’ Osborne과 함께 쓰리프트웨이에서 일하던 또 다른 직원의 이름이었다.


커트는 블랙 플래그의 《Damaged》를 듣고 펑크 로커가 되기로 결심한다.

커트는 몬테사노 고등학교 미술 수업에서 멜빈스의 리더이자 보컬리스트, 학교 선배인 건장하고 거친 외모의 소년 버즈 오스본을 다시 만났다. 버즈는 섹스 피스톨스의 사진첩을 커트에게 빌려주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버즈가 커트에게 미국 록 잡지 『크림』의 사본을 전달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또 다른 기록은 1978년 1월에 섹스 피스톨스가 미국 투어를 중단했을 때 커트는 이미 『크림』을 구독한 걸로 전한다. 버즈에겐 또한 블랙 플래그나 플리퍼Flipper, MDCMillions of Dead Cops 같은 남부 캘리포니아 밴드들의 곡을 담은 테이프도 있었다. 커트의 손으로 건너간 그 테이프들 중 첫 번째 것의 첫 번째 곡이 바로 블랙 플래그의 《Damaged》 수록곡이었다. 커트는 소외, 외로움, 편집증을 다룬 가사로 무장한 블랙 플래그를 듣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노래를 듣는 것 같았어요. 받아들이는 데 며칠이 걸렸죠. 펑크 록의 가사는 일반 로큰롤 것들보다 더 명확하고 현실적으로 말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커트는 그 길로 펑크 로커가 됐다.


나는 열한 살 때 펑크 록을 발견하고 즉시 펑크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당시 잡지 『크림』을 읽고 있었는데, 펑크 음악의 사도마조히즘적이고 반항적인 면이 대번에 나를 매료시켰다. 내가 펑크를 본격적으로 접한 건 열다섯 살 무렵이었다.

커트 코베인(89년 9월, 『로커릴라Rockerlilla』와의 인터뷰에서)


앞서 언급했듯 커트는 10대 초반에 이미 섹스 피스톨스, 즉 펑크 록이라는 음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는 『크림』을 통해 “섹스 피스톨스의 야생성”과 그들의 활약상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모든 학교 수업 시간의 책상과 파일 폴더에 섹스 피스톨스 로고를 그렸다. 하지만 “코드 3개와 스크리밍”이라는 펑크 록의 아이디어가 그를 매료시켰음에도, 애버딘의 음반가게에는 펑크 록 앨범이 없었기 때문에 커트는 펑크가 실제 어떤 음악인지 모르고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상상 속 그 음악을 위해 밴드를 시작할 것이고, 펑크 록이 인기를 끌 것이라는 말을 지인들에게 다짐처럼 하고 다녔다. 블랙 플래그는 그런 커트 앞에 나타난 펑크 록의 실체였다. 몇 년 뒤, 커트는 각종 펑크 록 음반들을 소화해나가던 중 클래시의 세 장짜리 정규작 《Sandinista!》도 만났으나 자신이 생각한 펑크 사운드와 전혀 맞지 않아 실망만 한 적도 있다.


난 순식간에 개종했다. 펑크 록은 내 안에 있던 분노 때문에 자폭할 것 같았던 날 구원해준 음악이다. 또한 펑크 로커가 된 일은 자존감이 낮았던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펑크를 듣는 몇 년 동안 나는 성장하고 가치관을 정립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펑크 록을 듣게 돼 정말 기뻤다. 펑크 록은 신의 선물이었다.

커트 코베인


클래시의 세 장짜리 정규작 《Sandinista!》는 펑크 앨범이었으되 커트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저명한 음악 평론가 그레일 마커스Greil Marcus가 정의한 것처럼 펑크 록은 “지적 테러리즘”이란 형태로서 음악이 지향하는 쪽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커트에게 펑크는 개인적이었다. 펑크는 자신의 주관이 평균인들 것과 달라서 느낀 위화감, 또 자신과 비슷한 부류가 없어 느낀 고독감에 습격 당하고 있던 커트에게 삶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고 ‘넌 외톨이가 아니야’ 다독이는 친구가 돼주었다. 커트는 10와트짜리 작은 앰프 볼륨을 최대로 올려 오직 해방감만을 위해 펑크 록을 연주했다. 조금 과장된 감도 있지만, 기타를 손에 넣자마자 자신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음을 자각하고 기타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그의 말은 때문에 사실로 보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기타를 들고 곡으로 말해.” 버즈 오스본의 조언에 커트는 더 힘을 얻은 것 같다. 비록 “로큰롤에의 음악적 기여”를 위해선 몇 년이 더 흘러야 했지만 커트에겐 세상에 내놓을 좋은 곡을 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었고, 그 곡을 발표할 기회가 오리란 확신도 있었다.


펑크의 정신이라 일컫던 ‘스스로 해라Do It Yourself-DIY’를 뇌리에 새긴 커트는 울워스Woolworths 마켓에서 14.99달러를 주고 산 휴대용 도시바Toshiba 녹음기로 자기 곡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시간 만에 쓴 <Creation>을 버즈에게 들려주었고 버즈는 “나쁘진 않아. 좀 더 손만 보면 되겠어”라는 감상평을 전했다. 커트는 버즈가 애써 좋게 말해주었다는 걸 알고 이후부턴 곡이 완성되기 전까진 누구에게도 자신의 곡을 들려주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커트는 맷 루킨Matt Lukin이란 인물과도 가깝게 지냈다. 커트와 맷은 베이브 루스 리틀 리그 야구팀에서 처음 만났다. 맷은 “기름기 많은 머리에 반항적인 아이”로 커트를 기억했다. “커트는 조용하고 마른 체형이었어요. 우린 좋아하는 록 밴드에 관해 이야기했죠. 둘 다 야구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둘은 벤치에 앉아 키스Kiss, 칩 트릭Cheap Trick을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쌓았다. 나중에 맷은 쓰리프트웨이 주차장에서 커트에게 충격을 주었던 멜빈스와 머드허니Mudhoney의 원년 베이시스트로 역사에 남는다.


1981년 몬테사노 고등학교에서 작은북을 연주하고 있는 커트(왼쪽)와 같은 해 같은 학교의 사진첩. 아래 좌측 위에 커트가 보이고, 우측 대각선 아래에 맷 루킨이 보인다.


1984년 8월. 커트는 버즈, 맷과 함께 마운티니어 클럽Mountaineer Club에서 열린 블랙 플래그의 슬립 잇 인Slip It In 투어 공연을 보러 시애틀로 향했다. 이 공연 표와 공연장에서 피울 마리화나 30그램을 사기 위해 커트는 당시 갖고 있던 저니, 포리너Foreigner, 팻 베네타Pat Benatar 앨범들을 12달러에 팔았다. 커트는 나중에 한 모든 인터뷰에서 이 공연이 자신이 본 첫 번째 콘서트였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1년 여 전, 시애틀 라디오 방송국KISW을 통해 들은 곡들을 눈으로 확인하려 시애틀 센터 콜리세움Seattle Center Coliseum에 가 새미 헤이거Sammy Hagar와 쿼터플래시Quarterflash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고로 운전면허를 따고 몇 주 뒤 보러간 이 공연이 커트 인생의 첫 록 공연이었다. 공연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커트는 다음 날 새미 헤이거 티셔츠를 입고 학교에 나타났다. 그는 같은 해 여름 터코마 돔Tacoma Dome에서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팝, 록 내에선 장르에 딱히 선을 긋지 않았던 커트는 이처럼 90년대를 뒤엎을 자기 음악을 위해 남들 음악을 게걸스럽게 소화해나가고 있었다.


커트가 완전체 멜빈스와 마주한 계기는 의외로 버즈나 맷이 아니었다. 멜빈스와 커트를 이어준 사람은 열두 살 때 비-피프티투스The B-52’s의 SNLSaturday Night Live 무대를 함께 지켜본 친구 브렌든Brendan이었다. 브렌든은 다름 아닌 멜빈스 드러머 데일 크로버의 지인이었고, 커트는 당시 누군가의 집 다락방이었던 멜빈스 연습실에 데일이 브렌든과 함께 초대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때 멜빈스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와 크림, 후The Who를 커버하던, 밴드로서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 아이언 메이든에 소속된 키스 문Keith Moon 같은 헤비메탈 드러머를 찾고 있었던 버즈. 그 사람이 바로 램페이지Rampage 출신인 데일 크로버였다. “‘선샤인 키즈’라는 정신장애인 단체를 위한 크리스마스 자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었어요. 그래서 애버딘 시내에 있는 엘크스 홀Elks Hall에 갔는데 거기서 멜빈스를 만났죠.” 이후 ‘클링온 『스타트렉』에 나오는 외계인. 멜빈스 골수팬들이 외계인과 같은 기괴한 행동을 하고, 버즈의 말이면 무엇에든 집착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으로 불릴 고정 팬덤이 없었던 데다, 그레이스 하버의 헤비메탈 팬들로부터는 놀림을 받던 당시 멜빈스는 아직 펑크 록 밴드로 변하기 전이었다.


록 밴드를 처음 가까이서 본 커트는 그날 연습실에서 꽤 흥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밤새 와인을 마시고 취해서 정말 무례하게 굴었던 것 같다. 멜빈스에게 수도 없이 칭찬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연주했고, 내 아이언 메이든 앨범보다 더 강한 에너지로 연주했다.” 커트는 그곳에서 클링온이 될 제시 리드Jesse Reed도 만났다. 제시는 블랙 플래그의 앞 글자를 따 ‘블랙 리드’로도 불렸다. 커트와 제시는 같은 애버딘 고등학교엘 다녔다. 둘은 금세 친해졌다.


《Deep Six》는 조악한 녹음 상태와 별개로 그런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컴필레이션으로 평가 받는다.


1985년 8월과 9월. 레코딩 엔지니어 크리스 핸즈크Chris Hanzsek는 여자 친구 티나 카살레Tina Casale와 함께 시애틀의 아이언우드 스튜디오Ironwood Studios에서 역사적인 녹음을 한다. 여기엔 멜빈스를 비롯해 그린 리버Green River, 맬펑션Malfunkshun, 스킨 야드Skin Yard, 사운드가든, 유-멘U-Men 같은 초기 시애틀 록의 전설들이 참여했는데, 이 음원은 핸즈크와 티나의 레이블인 C/Z 레코드C/Z Records-티나가 제안한 ‘C/Z’라는 상호는 크리스 핸즈크의 이름을 줄인 것이다에서 1986년에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 《Deep Six》에 실린다. 비록 카세트 녹음기로 작업한 듯 사운드는 조야했지만, 이 모음집은 미국 전역의 다양한 지역 신을 관찰하던 브루스 파빗Bruce Pavitt이 시애틀 록 신을 더 깊이 파고들게 한 작품으로서 중요했다. 브루스는 너바나의 첫 소속사가 될 서브 팝의 공동 창립자다.


멜빈스와 함께 앞서 언급한 밴드들은 아트 록을 표방한 유-멘을 빼면 모두 펑크 록 계통이었다. 이들은 키스, 에어로스미스 같은 70년대 프롤레타리아 하드 록과 헤비메탈을 두루 혼합해 “투박하지만 효과적인 음악적 혼종”을 들려주었다. 그린 리버와 머드허니를 거친 스티브 터너Steve Turner의 말처럼 그 가운데서도 멜빈스는 당시 최고 하드코어 밴드로 추앙되던 어큐즈드The Accüsed보다 더 빠르고 타이트했다. 멜빈스가 느려진 건 블랙 플래그가 1984년작 《My War》에서 음악 속도를 늦췄기 때문이었다고 평론가 에버렛 트루는 썼는데, 이는 블랙 플래그가 시애틀 펑크 신에 끼친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점이다. 에버렛은 덧붙이길, 그렇게 느려진 멜빈스는 믿기 힘든 점성粘性과 슬러지한 맛을 지닌 1987년작 《Gluey Porch Treatments》로 시애틀 그런지에 결정적인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결국 멜빈스는 시애틀 사운드의 원조 격으로 추앙받는 블랙아웃츠The Blackouts처럼 하드 록과 메탈을 흡수한 변종 펑크 록인 그런지의 창시자 중 한 팀이 된다. 이전까진 유-멘 같은 아트 록 밴드가 지배했던 시애틀 음악계에 혁명을 일으킨 멜빈스. 훗날 멜빈스가 템포를 더욱 늦췄을 때 펑크는 자신이 부수려 했던 다른 록 장르를 불러들여 프로그-펑크prog-punk라는 모순된 이름을 갖게 된다.


빠른 펑크 록을 구사했던 멜빈스는 《Gluey Porch Treatments》로 템포를 늦추면서 '그런지의 창시자' 중 한 팀이 됐다.


커트는 그런 멜빈스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도 보았다. 멜빈스에 합류하고 한 달 뒤 애버딘 고등학교 흡연실에서 커트를 만난 데일 크로버의 말이다. “우린 커트가 기타 연주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마침 세컨드 기타를 추가하려던 차여서 커트를 영입할 생각도 해봤지만, 그에겐 장비가 하나도 없었어요. ‘앰프도 없는데 어떻게 연주하겠어?’라는 생각이 들었죠. 합격, 불합격이 아니라 당시 커트는 돈도 없고 준비도 안 된 상태였습니다.” 버즈 오스본은 아예 오디션이라는 말 자체를 부정했다. “커트가 우리 오디션을 봤다는 얘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절대. 우린 커트와 이미 여러 번 잼 세션을 했고, 크리스(노보셀릭)도 마찬가지였어요. 오디션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디션이었건 아니었건 당사자의 회고에 따르면 멜빈스 입성은 이래저래 잘 풀리진 않았던 듯하다. “완전히 망쳤어요. 너무 긴장해서 노래 가사를 다 잊어버렸고, 단 한 음도 연주할 수가 없었죠. 그냥 기타를 들고 서서 얼굴이 붉어진 채로 피드백을 받았던 기억 밖엔 없네요.” 물론 커트의 멜빈스 영입 불발은 너바나 팬들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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