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런지의 도화선, 펑크 록

by 김성대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내가 펑크 록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어이, 호모!’라며 맥주병을 던지곤 했어요. 가는 곳마다 그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죠.”

톰 프라이스Tom Price, 유-멘 기타리스트



작가 닐 스트라우스Neil Strauss는 큰 소리, 빠른 템포의 하드코어 펑크를 그런지의 시작으로 보았다. 태초에 캘리포니아 신scene을 주름잡은 블랙 플래그, 디센던츠Descendents, 데드 케네디스Dead Kennedys, 미닛멘Minutemen이 있었고 너바나를 낳을 ‘워싱턴의 발화점’인 마이너 스레트Minor Threat, 미네소타의 리플레이스먼츠The Replacements와 허스커 두Hüsker Dü도 비슷한 시기를 지탱했다. 조지아 주 애선스Athens에선 다른 성향의 알이엠과 비-피프티투스가 등장하는데, 이즈음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베이비붐 세대가 지배해 온 음악 산업이 휘청거릴 만큼 성장한다.


너바나 전기 작가 마이클 아제라드는 알이엠이 그중 첫 번째 폭발을 일으켰다 여겼고, 텍사스의 버트홀 서퍼스Butthole Suffers와 스크래치 애시드Scratch Acid, 지저스 리저드The Jesus Lizard, 피닉스의 미트 퍼펫츠Meat Puppets, 일리노이의 빅 블랙Big Black, 뉴욕의 소닉 유스와 라이브 스컬Live Skull, 시애틀의 그린 리버와 멜빈스, 매사추세츠의 픽시스Pixies와 다이너소어 주니어Dinosaur Jr., 그리고 LA의 제인스 애딕션Jane’s Addiction 등이 쏟아져 나오며 빅뱅이 일어났다. 슬레이어Slayer의 《Reign in Blood》를 포켓북 분량으로 분석한 작가 D.X. 페리스D.X. Ferris의 말처럼 그렇게 “연주하기 쉽고 덜 어렵고 덜 위협적이며, 더 감성적인 그런지”의 발판이 선구자들의 연이은 출현으로 마련됐다.


시애틀 출신 삽화가 에드 포더링햄Ed Fotheringham에 따르면 잦은 비에 노출된 시애틀 사람들은 지하실에서 시끄러운 기타를 연주했다고 한다. 유-멘의 프런트맨 존 비글리John Bigley는 거기서 조금 더 올라와 갤러리 숍 앞 또는 창고를 이용하거나, 가끔 술집을 빌려 무대를 꾸렸다고 기억했다. 같은 밴드의 베이시스트인 짐 틸만Jim Tillman은 그 공연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관객은 대부분 괴짜들로, 그중 절반은 밴드에 속해 있었죠. 교외에서 온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매 공연마다 같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어요.” 이 자발적 커뮤니티 성향은 중요한데, 몇 년 뒤 세계 대중음악계에 개벽을 일으킬 그런지 신이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애틀 화가 휘팅 테니스Whiting Tennis가 “한 공연이 다른 공연으로 이어지고, 그러면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라고 증언한 부분, 그런 뒤 ‘나도 밴드를 결성할 수 있겠어’라며 관객들이 저마다 마음에 희망을 품는 장면은 그런 정황을 드러낸다. 머드허니의 마크 암Mark Arm은 시애틀의 저 열린 분위기를 이렇게 정리했다.


LA, 보스턴, 뉴욕의 하드코어 신과 달리 80년대 초 시애틀의 펑크, 하드코어 신은 꽤 개방적이었다. 누구나 올 수 있었다.



80년대 초 시애틀 록 신엔 하드코어/펑크 팬과 메탈 팬들이 뒤섞여 있었다. 인디 음악 팬들 경우엔 영국의 선구적 포스트 펑크 밴드로 평가받는 갱 오브 포Gang of Four나 펑크, 로커빌리, 이기 팝Iggy Pop,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70년대 후반 호주 밴드 버스데이 파티The Birthday Party를 좋아했다. 하지만 시애틀은 LA나 뉴욕처럼 록 키드들이 각자의 클럽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시애틀은 작은 도시였고, 때문에 그들은 한 곳에 모여야 했다. 앞선 증언들은 그 한계 상황의 묘사였다.


이 시기 시애틀 펑크 신은 커버를 전문으로 했던 바bar 밴드들이 오리지널 DIY 펑크를 표방하며 자신들의 시장을 바닥부터 다시 구축했다. 미래 그런지의 도화선이 될 이 변화는 블랙 플래그, D.O.A. 등 외지에서 온 신예 펑크 밴드들의 잊을 수 없는 현지 공연으로 비로소 공식화되었다. 블랙 플래그의 베이시스트 척 두코브스키Chuck Dukowski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시애틀에서 블랙 플래그가 첫 공연을 한 해는 1979년인가 80년이었을 거예요. 우리의 첫 번째 투어는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시애틀을 거쳐 밴쿠버로 향하는 여정이었죠. 당시 시애틀 공연은 워터프런트Waterfront 환락가에 있는 레스토랑 아래 고급 클럽에서 열렸는데, 우린 몇 곡을 반복한 뒤 길고 거친 버전의 <Louie Louie>를 연주하며 공연을 연장시켰어요.” 시애틀 출신인 더프 맥케이건Duff McKagan은 그때 블랙 플래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블랙 플래그는 헨리 롤린스Henry Rollins가 합류하면서 잘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 시절 우리에겐 신과 같았습니다.” 그건 블랙 플래그를 인생 밴드로 받아들인 커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단, 젊은이들의 문화라 해서 시애틀 펑크 신이 낭만적이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라이엇 걸Riot grrrl-1990년대 초 올림피아에서 일어난 언더그라운드 페미니즘 펑크 무브먼트. 커트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을 대표한 인디 레이블 킬 록 스타스Kill Rock Stars의 설립자 슬림 문Slim Moon에 따르면 당시 시애틀의 펑크 록 열기는 이름만큼이나 꽤 ‘하드코어’했던 듯하다. “폭동으로 변한 D.O.A. 공연에 갔었어요. 그때 내가 펑크 록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뉴스위크Newsweek』 기사를 통해 배운 진부한 내용뿐이었죠. 그 공연이 폭동이 된 건 한 스케이트보더가 길에 주차된 모든 차들의 창문을 보드로 부수면서였어요.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고, 경찰차 옆면에 ‘아나키즘 스프레이’를 뿌리는 사람도 있었죠. ‘세상에, 펑크 록이 정말 소문 대로구나!’ 싶었어요.” D.O.A.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았던 조 키슬리Joe Keithley도 슬림 문과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시애틀을 자유주의와 진보적 사고의 보루로 생각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곳 관공서 직원들은 아이들이 음악을 듣는 것보다 쇼핑몰이나 편의점을 다니며 사소한 절도를 계획하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어요. 일단 시애틀에선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 열리지 않았는데 1983~84년 우리 공연의 경우, 3백 명 수용 공연장에 4백 명 정도 펑크키드들이 찾아와 현장이 꽉 찼었죠. 이에 소방관들이 모든 사람들을 건물 밖으로 대피시켰고, 시애틀 경찰까지 출동했어요. 본격적인 폭동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병을 던지는 등 폭동 비슷한 게 일어나긴 했습니다. 그때 나는 시애틀 경찰차 3대를 봤는데, 누가 차 뒤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DOA’라고 써놨더군요.



조 키슬리는 밴쿠버D.O.A.는 밴쿠버 출신이다와 시애틀은 꽤 가까움에도 “국경이라는 멍청한 장벽 때문에”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오가는 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조에게 “내가 본 펑크 밴드는 D.O.A.가 처음이거나 두 번째였다”라고 말하곤 했다. 당시 시애틀의 펑크 붐은 영국 펑크 록 밴드 GBH의 <Pass the Axe>라는 곡을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이 곡이 묘사한, 시애틀 크로스오버 스래시 메탈 밴드 어큐즈드와 GBH의 공연 및 한 무리의 펑크 팬들이 도끼와 소화기로 선박Ferry을 파괴한 사건은 당시 시애틀이 받아들인 펑크의 폭력적 열기를 전해준다.


이처럼 시애틀 펑크 록 팬들의 일상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애틀 파워팝 밴드 스태그Stag의 프런트맨 스티브 맥Steve Mack의 기억은 그 피로감을 재삼 환기시킨다. “밴쿠버 펑크 록 밴드 포인티드 스틱스Pointed Sticks가 연주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슬램 댄스를 추기 시작했고, 그 사이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했어요. 경찰은 곧장 출동해 공연장을 폐쇄했죠.” 더프 맥케이건은 1982년 즈음 시애틀에서 펑크 록이란 “학교나 스포츠 팀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의 피난처”였고, 펑크 로커들은 그런 운동선수들에게 얻어맞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더프의 10대 시절에도 부분적으로 반영됐다. 그는 열여섯 살 때 니코 틴Nico Teen이라는 썰렁한 예명을 쓰며 시애틀 펑크 밴드 베인스The Vains에서 활동했다. 이어 마더 러브 본Mother Love Bone의 드러머가 될 그렉 길모어Greg Gilmore와 함께 한 리빙The Living이란 밴드에선 기타를 연주했고, 패스트백스The Fastbacks에선 드럼을 치며 자신의 포지션을 탐색했다.


시애틀에서 자신의 미래를 비관한 더프 맥케이건은 LA로 가서 건스 앤 로지스라는 밴드에 베이시스트로 합류, 데뷔작을 내며 '대박'을 터뜨린다.


80년대 초엔 하드코어의 속도 대신 사바스Black Sabbath의 어두운 헤비니스를 받아들인 파츠The Fartz, 텐 미닛 워닝10 Minute Warning에서 활동하며 그런지를 예고한 더프는 1984년 ‘시애틀에 머물러서는 내 음악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브루스 파빗의 말이다. “처음 시애틀로 이사 왔을 때 레이크 유니언 카페라는 레스토랑에서 조리사로 일했어요. 그때 더프는 제빵 보조로 있었는데, 내가 당근을 썰고 있으면 더프는 옆에서 케이크에 피칸을 얹곤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더프가 'LA로 가서 음악가 커리어를 쌓을 거야'라고 말했던 게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시애틀을 떠난 더프는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라는 피난처에서 데뷔작을 천만 장 이상 팔아치우며 자신의 말을 실현했다. 물론 브루스 역시 서브 팝이라는 레이블을 전설로 남기며 시애틀을 떠나기 전 내린 더프의 진단이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현재란 과거를 등에 업고 미래를 잉태한 것이다

라이프니츠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인 로드 무디Rod Moody는 펑크 담론의 창구 역할을 한 잡지 『펑크 러스트Punk Lust』를 운영했던 시애틀 출신 윌럼 퍼그머Wilum Pugmyr를 기억했다. 또 시애틀 뮤지션 팀 헤이즈Tim Hayes는 시애틀 펑크 잡지 『데스퍼레이트 타임스Desperate Times』를 종종 사보곤 했다. 이렇듯 80년대 시애틀은 에어로스미스의 《Rocks》와 블루 치어Blue Cheer의 《Vincebus Eruptum》에 거친 펑크 록의 에너지가 결합해 그런지라는 90년대 대표 록 장르를 잉태하고 있었다. 거기엔 앞서 살펴본 팀들 외에도 새크라멘토 출신 하드코어 펑크 밴드 테일스 오브 테러Tales of Terror, LA 펑크 록 밴드 텍스 앤 더 호스헤즈Tex and the Horseheads 같은 밴드들의 '무서운' 기운도 공존했다.

keyword
이전 06화[1983-1985] 멜빈스와 블랙 플래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