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 록과 멜빈스를 만난 10대 중반의 커트는 폭풍 같은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맘땐 누구나 그렇듯 커트 역시 이성異性에 눈을 뜨고 성 경험에 민감해했다. 그의 이성 경험은 1983년 여름, 친구 대린Darrin Neathery의 여동생 안드레아 반스Andrea Vance를 시작으로 영화 『커트 코베인: 몽타주 오브 헥』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다룬 ‘지적장애를 가진 소녀’까지 이어졌다. 특히 후자는 나중 커트가 사회적 차별에 강한 반감을 품게 되는 계기였다는 데서 중요하다. 이야기는 대략 이랬다. 웬디에게 받은 정신적 학대가 극에 달했던 때 커트는 너무 우울해진 나머지 친구 트레버 브릭스와 존 필즈를 따라 소녀의 집으로 가 소녀 아버지의 술을 훔치는 등 비행을 저질렀다. 애니메이션에도 나오듯 커트는 홀로 소녀를 다시 찾았고, 소녀의 방에서 섹스 직전까지 갔다. “섹스를 하려고 했는데 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 애의 질에서 나는 냄새, 땀 냄새 등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커트의 일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그날, 지적장애인 소녀를 첫 성경험 대상으로 이용하려 든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과 혐오감은 커트를 평생 따라다녔다.
84년 4월 어느 날, 커트가 파티에서 만난 두 여자를 엄마 집으로 데리고 갔다. 한 명은 술에 취해 기절했고, 다른 한 명인 재키Jackie Hagara는 옷을 벗고 커트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커트가 “순결을 잃기” 직전 웬디가 들이닥쳤다. 쫓겨난 세 사람은 재키의 친구 집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감옥에 있는 줄 알았던 재키의 남자친구와 만난 일행. 커트는 결국 재키의 친구와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웬디는 아들이 돌아오길 원치 않았다. 친구 그렉 호칸슨Greg Hokanson의 기억에 따르면 웬디는 심할 경우 한 시간 동안 커트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10대의 절정기에 커트는 엄마와 최악의 관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커트는 이 시기 자신이 곁에 있는 걸 엄마가 원망한다고 느낀 나머지, 스스로는 더욱 내면으로 숨어 들어갔다고 했다. 평론가 믹 월은 푸 파이터스 전기에서 당시 커트를 이렇게 묘사했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확신이 없었으며, 너무 말라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기도 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재치 있고 날카롭게 반응했지만, 기본적으로 내성적인 데다 사회성이 부족해 대부분 시간을 지저분한 금발 머리 아래 눈을 번뜩이며 침묵으로 보냈다.
커트의 왜소한 몸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지됐는데, 1992년 4월 커트를 인터뷰 한 『새시』의 에디터 크리스티나 켈리는 그에게 강제로 밥을 먹이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다.
아들과 최악의 관계로 치달았을 때 웬디는 항만 노동자였던 팻 오코너Pat O’Connor를 사귀기 시작했다. 84년 겨울, 동거했던 전 여자 친구와 이별 위자료 소송에 엮인 팻이 작은 집 한 채, 저축한 몇 천 달러, 세 자루 총이 든 총기 보관용 상자를 갖고 웬디에게 왔다. 그러나 합친 둘은 자주 싸웠다. 한 번은 금주 약속을 어기고 술에 취해 있던 팻을 죽여 버리겠다며 웬디가 총을 든 일도 있었다. 다행히 웬디는 장전 방법을 몰랐다. 딸 킴벌리에 따르면 웬디는 봉지에 총을 넣어 위시카 강둑까지 끌고 갔다. “총을 없애 버리지 않으면 팻을 정말 죽이게 될 거야.” 웬디는 그래서 총을 강에 버렸다. 다음날 커트는 여동생에게 어디에 총을 버렸냐 물었고, 친구 두 명과 현장에 가 그 총을 다시 건졌다. 커트는 훗날 인터뷰에서 그 총들을 팔아 손에 넣은 26달러로 자신의 첫 번째 기타를 샀다고 했지만, 그때 그가 총과 바꾼 건 기타가 아닌 펜더 디럭스Fender Deluxe 앰프였다. 기타는 열네 살 때 외삼촌 척이 이미 사준 바 있다.
커트는 “집채만 한 몸집에 여자나 패는 비열한 인간”이던 엄마의 새 남자친구를 싫어했다.그는 웬디의 팔을 부러뜨린 적도 있다고 한다. 팻은 “(남자란) 사내답게 행동하는 진짜 사나이가 돼야 한다”라고 설교하는 꼰대 마초였다. 본인 기준에 여자들을 존중할 줄 알았던 커트는 “사나이답지 못한 호모”였다. 이런 팻과 더는 한 지붕 아래 있을 수 없었던 커트는 기타 앰프와 옷가지들을 쓰레기봉투에 챙겨 집을 나온다. 이는 가족으로부터 정서적,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커트의 ‘마지막 탈출’이었다.
엄마 집에서 나온 커트는 이때부터 친척과 친구 집을 떠돈다. 중에서도 데일 크로버네 현관에 있던 마분지 상자 안에서 쪽잠을 잤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정작 데일은 이를 부인한다. “커트가 우리 집 현관에서 잤다는 얘기가 사실인지는 나도 모른다. 우리 어머니는 그 얘기에 엄청 화를 내셨다. ‘커트가 우리 집 현관에서 잤는데 내가 전혀 몰랐다고?!!’ 커트는 아마 술에 취해 다른 집 현관에서 잤을 거다.” 커트는 중앙난방이 됐던 애버딘의 오래된 아파트 복도에서도 잤고, 폴 화이트Paul White라는 친구와 함께 자신이 태어난 그레이스 하버 커뮤니티 병원 대기실에서도 잤다. 이런 생활을 4개월 정도 하고 커트는 다시 몬테사노에 있는 아빠 집으로 가게 된다. 이는 웬디의 집 건너편 차고에 있는 낡은 소파에서 잠을 자던 커트를 새엄마 제니가 발견해 취해진 조치로 알려져 있다. 다시 들어간 아빠 집에서 커트는 꾸준히 하루 몇 시간씩 기타 연습을 했다. “커트 형은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 존 멜런캠프John Mellencamp 등 뭐든 한 번만 들으면 연주할 수 있었어요.” 커트와 같이 컬트 영화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를 내리 다섯 번 감상한 의붓동생 제임스는 커트의 음악 재능을 증언했다.
도널드는 자신의 새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제니는 커트에게 최선을 다했어요. 일자리를 구해주는 등 모든 일에 대처하려 노력했지만, 문을 쾅 닫거나 종일 자기 방에만 있는 커트의 행동은 온 가족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커트는 학교도 빠지고 집안일도 거부했어요.” 도널드는 자신이 주선해 준 식당 서빙 일자리에도 커트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나마 잔디 깎는 일엔 흥미를 갖는가 싶더니 그마저 곧 지루해했다. 당시 몬테사노의 실업률은 15퍼센트에 이르러 있었다. 도널드는 공부나 취업이 싫으면 군대를 가야 한다 커트에게 말했고, 실제 해군 징병 담당자에게 아들을 상담시켰다. “적어도 군대에선 세끼 더운밥과 잠잘 곳은 제공해 주잖아.” 친구 제시 리드에게 말했듯 커트는 이때 입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듯하다. 실제 커트는 입대 관련 테스트에서도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를 설득하려 지역 신병 모집 담당자가 이틀 연속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도널드가 커트를 설득해 기타를 전당포에 맡기고 해군 입대 시험을 치르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입대 직전이던 둘째 날 밤 커트는 지하실 방으로 내려가 마리화나를 피우고는 다시 올라와 “안 갈래요”라고 말했다고 아제라드는 너바나 전기에 쓰고 있다. 이 즈음 그린 것일까. 커트의 일기에는 풋볼 헬멧에 군복을 입은 남자가 목을 매는 그림이 있다. 그건 마치 아빠가 강요한 스포츠와 아빠가 권유한 군대 모두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로 보였다.
그 시절 무언가를 절박하게 찾던 커트는 멜빈스로 엮인 단짝 제시 리드와 교회엘 갔다. 제시는 커트가 “애버딘에서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좋은 친구”였다. 제시의 부모인 에델과 데이브 리드Ethel, Dave Reed는 개종한 기독교 신자로, 몬테사노와 애버딘 사이에 있는 센트럴 파크 침례교회Central Park Baptist Church에 다녔다. 이들은 자주 보고 집에도 종종 놀러 오는 커트가 자신들 집에 들어와 사는 걸 제안했고, 도널드와 제니는 허락했다. 아제라드의 책에 따르면 엄마 웬디도 동의했다고 한다. “커트를 위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종교적인 가정이었고, 데이브는 자신이 커트를 훈육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제니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건 에델 리드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커트는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단지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죠.” 84년 9월, 커트는 더플 백에 짐을 꾸려 노스 강North River 인근에 있던 리드 가家로 들어갔다.
112평 외딴집이었던 제시 네엔 아이들이 차지한 넓은 위층이 있었다. 거기엔 앰프도 있었고 음반도 많았다. 제시와 커트는 그곳에서 종일 기타를 쳤다. 이모 메리, 외삼촌 척과 함께 어린 커트에게 음악의 꿈을 심어준 데이브 리드는 사실 척과 싱글을 발표한 비치코머스 멤버로도 활약한 인물이었다. 커트는 나중 감사의 마음을 담아 데이브를 위한 곡 <Diamond Dave>까지 쓴다.
예술 생활에 늘 열려 있었던 리드 부부는 버즈 오스본, 맷 루킨과 함께 커트가 블랙 플래그의 시애틀 공연을 보러 가는 것도 허락했다. “1984년에 열린 공연 중 두 번째로 좋았던 공연.” 시애틀 음악지 『더 로켓The Rocket』은 당시 블랙 플래그의 공연을 그렇게 평가했다. 1979년 『시애틀 선Seattle Sun』의 삽지로 시작한 『더 로켓』은 시애틀 언더그라운드의 ‘구멍가게’이자 정보 제공처였다. 표면적으론 북서부 지역에 집중했던 이 잡지는 그런지 유행 때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을 표지에 실으며 지명도가 급상승한다. 『뉴스위크』, 『빌리지 보이스』, 『메트로폴리스』, 『바이브Vibe』, 『베너티 페어Vanity Fair』 등의 아트 디렉터들이 그렇게 『더 로켓』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너바나가 계약하는 서브 팝이 『더 로켓』의 칼럼에 뿌리를 둔 이야기는 뒤에서 다룰 예정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6개월 앞두고 커트는 보충해야 할 학점이 심각하게 밀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술 교사 밥 헌터는 커트가 지원만 한다면 미술대학에 진학해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커트는 선생님 조언에 따라 대학 장학금이 걸린 대회에 두 차례 나가 두 번 모두 입상했다. 이 중 1985년 지역 고교 미술 전시회에 내걸린 커트의 작품은 교육감 사무실 영구 전시 작품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탁월한 그림 재능과 별개로 커트에게 비행은 이미 일상이 돼 있었다. 제시의 집에 들어간 뒤로 커트는 마리화나를 피우기 위해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다. 졸업을 불과 몇 주 앞둔 85년 5월, 커트는 결국 자퇴를 결심한다. 친구들과 달리 본인은 졸업을 위해 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자퇴 후 커트는 대안학교인 컨티뉴에이션Continuation 고등학교에 첫 학기를 등록했지만 역시나 적응하지 못하고 2주일 뒤 “중퇴생들을 위한 학교에서도 중퇴”했다.
그렇다고 커트가 아무 생각 없이 산 건 아니다. 아버지의 식당 일 주선엔 시큰둥했던 그가 데이브 리드가 구해준, 시급 4달러 25센트를 주는 그레이랜드Grayland 소재 램프라이터 레스토랑Lamplighter Restaurant 일엔 응했다. 중요한 건 그런 데이브에게 시애틀 캐피톨Capitol Records에서 홍보 담당 일을 하는 지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지인은 비치코머스의 옛 멤버이기도 했으니 외삼촌 척과도 잘 아는 사이였을 터다. 커트는 이 사실을 알고 데이브에게 그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며 필사적으로 졸랐다고 한다. “커트는 자신의 (음악) 커리어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리라 여겨 늘 아버지의 지인을 만나고 싶어 했다.” 제시의 기억은 열일곱 살 커트가 이미 음악 비즈니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러나 커트는 제시의 집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커트를 바른 길로 이끌어보려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 데이브 리드는 커트를 실패자로 여겼다. 결정적으로 “커트가 제시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며 데이브는 웬디에게 커트를 내보내는 이유를 설명했다. 끝내 리드 가를 나온 커트. 같은 때 제시도 친구를 따라 나온다. 둘은 한동안 제시의 할아버지 집에 살았다. 그리고 85년 6월 1일, 커트는 도널드가 보내준 양육비 일부를 보증금으로 사용해 애버딘 노스 미시간 가N Michigan St에 있던 월세 100달러짜리 아파트로 제시와 함께 이사했다. 커트는 워싱턴 해안의 한 리조트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집세를 냈다. 이즈음 커트는 제시에게 함께 연주하자고 제안하는데, 친구가 베이스를 샀다는 말에 커트는 매우 흥분했다고 한다. 하지만 흥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밤 함께 연주를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제시는 내가 만난 이들 중 가장 재능 없는 사람 축에 속했다. 제시는 <Louie Louie>도 연주할 줄 몰랐다.” 제시와 커트는 일주일 정도 내리 먹은, 기름기 많은 햄버거 접시를 싱크대에 넣고 물을 가득 채운 채 5개월 동안이나 방치했다고 한다. 5개월은 좀 과장된 듯 보이지만, 이들 생활이 어떤 식으로 꾸려졌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는 사이 제시는 학교를 졸업했다. 집 보증금을 함께 낸 제시가 버거킹에서 일하던 때 커트는 제시를 집에서 내보냈다. 함께 살고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졸업하고 해군 입대를 생각하고 있던 제시는 할머니와 생활했다. 이 시기 커트는 거칠게나마 곡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엔 “우린 모두 같아. 그저 똥 덩어리 위의 파리들이지”라는 노랫말을 가진 <The Class of ’86> 같은 곡이 포함됐다. 졸업한 친구들을 향한 분노를 담은 노래였다. 저 “똥덩어리 위의 파리들”은 커트의 첫 정식 밴드가 녹음한 데모의 커버 아트워크로 쓰인다. 밴드 이름은 페컬 매터Fecal Matter였다.
제시가 떠나고 2개월이 지났다. 커트는 월세를 감당할 수 없었고, 85년 늦가을에 몇 달치 월세가 밀린 채 짐을 쌌다. 지난 2년 사이 간헐적으로 당면한 홈리스 생활의 세 번째 서막이었다. 그는 친구 그렉 호칸슨 어머니의 낡은 볼보 세단 자동차 뒷좌석에서 자기도 했다. 커트는 그렉의 집에도 잠시 머문 모양인데, 그렉의 모친은 아들 친구를 썩 탐탁지 않아 한 듯 보인다. “커트와 사는 건 악마와 함께 사는 것 같았어요. 그 녀석은 그렉의 침실 가구를 부수고 벽에 낙서를 하는 등 난동을 부렸죠.” 직업이나 집이 없어도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자부심을 느꼈다는 커트는 다시 해군 입대를 고민했다. 바로 그때 리드 가족에 이은 또 다른 가정에서 구원의 손길이 왔다. 실링거Shillinger 가족이었다. 실링거 가족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파일 폴더에 ‘Motörhead’가 적혀 있었다는 이유로 가까워진 고등학교 동기 스티브Steve Shillinger의 동생 에릭Eric Shillinger이 커트와 친구가 되면서였다. 에릭은 기타도 연주했는데, 스티브는 에릭과 커트가 앰프에 기타를 꽂고 아이언 메이든의 <Rime of the Ancient Mariner>를 함께 연주했다고 기억했다. 나중 에릭과 커트는 이를 한사코 부인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곤 한다.” 스티브는 아제라드의 책에서 말했다.
실링거 형제의 아버지 라몬트 실링거Lamont Schillinger는 애버딘 고등학교의 영어 교사였다. 실링거네는 저녁을 다 같이 먹고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실링거 가엔 스티브, 에릭을 포함해 아들이 다섯, 딸이 한 명 있었기 때문에 먹여 살릴 입이 하나 더 느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라몬트는 커트에게 음악도 하도록 격려했다. 여러모로 리드네와 비슷한 환경이었다. 커트는 85년 늦겨울 때부터 약 8개월 동안 이 집에 머물렀다. 소파에서 잠을 잔 커트는 자신을 거두어 준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집안일을 거들었다. 그는 실링거 댁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져 있었고, 곧 만나게 될 크리스(노보셀릭)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미용실 맞은편 YMCA에 취업도 했다. 밴드 결성 전 장비 마련을 위해서였다. 그는 YMCA에서 여름 한철 동안 3~7세 아이들 서른 명을 책임졌다. 커트는 아이들에게 수영하는 법, 땅콩버터 젤리 샌드위치 만드는 법, 그리고 올바른 매너 등을 가르쳤다. 커트는 훗날 이 일이 자신이 정말 좋아했던 유일한 정규 직업이었다고 떠올렸다.
85년 크리스마스 때 커트는 엄마 집에 갔다. 웬디가 커트의 의붓동생 브라이앤느Brianne O’Connor를 낳은 뒤였다. 행복이 감돌았던 엄마의 집. 하지만 팻과 웬디는 커트에게 함께 살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커트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사실 실링거 부부는 커트 외에도 수년 동안 여러 부랑아strays들을 거둔 적이 있었다. 보통 하루나 이틀 뒤면 걱정하는 부모로부터 전화가 와 아이가 있는지 물어보곤 했다는 걸 부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커트의 경우는 달랐다. 라몬트의 기억이다. “커트가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아이 엄마로부터 한 번도 연락을 받지 못했어요.” 커트의 기분은 어땠을까. 사실상 무일푼이었던 커트는 도서관에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와 톨스토이Leo Tolstoy, 로라 잉걸스 와일더Laura Ingalls Wilder, 로렌스 반 데르 포스트Laurens Van Der Post, 미국의 무서운 거리를 정처 없이 방황하는 아웃사이더 이야기에서 자신을 본 것 같았다는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 등을 읽고 시를 쓰며 그해 겨울을 보냈다. 어쩌면 훗날 코트니에게 한 구절을 떼어 보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폭풍의 언덕』도 이때 읽은 것인지 모른다. 그렉 호칸슨은 “커트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라고 친구를 기억했다. 그렉은 커트의 집념에 가까운 다독 성향과 관련해 이런 에피소드도 전했다. “한날은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비디오를 빌려 커트와 함께 봤어요. 커트는 다음날 도서관에 가 원작을 구해 읽었고, 같은 책을 몇 번 더 정독한 다음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의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