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늘 《Bleach》 이전 앨범 한 장이 더 있길 바랐다. 페컬 매터 테이프에 담았던 곡들을 다시 녹음해 발표했어야 했다는 얘기다. 당시 우린 버트홀 서퍼스처럼 시끄럽고 실험적인 음악에 푹 빠졌었다.
커트 코베인, 1993년 MTV와의 인터뷰에서
1992년 한 영국 신문과 인터뷰 중 커트는 고향에서 밴드를 결성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애버딘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불량배처럼 살았어요. 대마초를 피우고 벽에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곤 했죠. 주위 애들은 대부분 반항적이었고, 부모도 자식한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우린 에너지를 쏟아낼 새로운 출구를 찾아야 했는데, 내 경우엔 밴드 결성이 그 출구였습니다.”
커트의 밴드 역사는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 커버 밴드였던 셀아웃츠The Sellouts, 공연 포스터에서 철자가 틀린 덕분에 ‘브라운 카우Brown Cow’로 역사에 남은 브라운 타월Brown Towel, 커트가 잠시 참여했던 멜빈스의 사이드 프로젝트 스티프 우디스The Stiff Woodies, 이름만 빼면 너바나 초기 라인업이었던 스키드 로우Skid Row, 친구 엄마의 남자친구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테드 에드 프레드Ted Ed Fred, 그리고 스로트 오이스터스Throat Oysters 정도였다.
거기에 또 한 팀이 있었으니, 커트에겐 너바나 이전 가장 의미 있는 밴드였을 페컬 매터다. 1985년 12월일부 사람들은 페컬 매터의 《Illiteracy Will Prevail》을 1986년 부활절에 녹음했다 주장하기도 한다, 커트는 베이스와 드럼을 맡아줄 데일 크로버와 함께 맷 루킨의 파란색 쉐보레 임팔라를 타고 워싱턴 주 벼리언Burien에 있는 이모 메리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 페컬 매터의 음악을 담을 4트랙 녹음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커트 곁 첫 드러머였던 데일 크로버는 10대 때 아이언 메이든 커버 밴드에 몸담은 걸 빼곤 독학으로 악기를 익힌 ‘괴짜 드러머’였다. 찰스 R. 크로스의 커트 전기에선 고등학생 신분에 투어를 떠날 수 없어 멜빈스를 쉬던 데일이 베이스를, 그렉 호칸슨이 드럼을 맡았다고 했는데 그렉은 이때 탈퇴하고 없었다. 페컬 매터가 데모를 녹음한 1985년은 “한 세대의 도덕을 파괴한 매우 느슨한 그런지”라는 평가를 이끌어낸 그린 리버의 데뷔작 《Come on Down》이 나온 해였다.
커트가 열네 살 때 메리는 조카에게 소형 리듬 머신Roland CR-78을 써도 좋다고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이 순수하기를 원했던 커트는 이모의 배려를 외면한 채 엄마의 핑크색 쌤소나이트 캐리어를 나무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곡들을 다듬었다. 4년 전 그러면서 썼던 오거나이즈드 컨퓨전Organized Confusion 대신 페컬 매터라는 이름을 들고 온 조카를 메리는 이렇게 기억했다. “커트는 노랫말을 잔뜩 써둔 두꺼운 공책을 가지고 왔어요. 오픈 릴Reel to Reel 녹음 등 기기 조작법 몇 가지를 알려주었더니 녀석은 꽤 능숙하게 다루더군요.” 커트의 공격적인 보컬에 깜짝 놀란 메리에 따르면 그 가사들은 외모와 옷차림으로 친구를 판단하는 또래 가치관에 대한 불만 등 거의가 “반항적이고 분노에 찬” 것들이었다. “이모는 내가 그렇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인지 전혀 몰랐던 것 같더라구요.” 커트는 이때 기타를 테이프 레코더에 직접 녹음했는데, 이는 몇 년 뒤 <Territorial Pissings> 같은 곡에서 다시 활용하게 될 ‘저예산 펑크 록 기법’이었다.
반항과 분노를 한 움큼씩 쥐고 커트가 이날 녹음한 곡들은 <Sound of Dentage>, <Bambi Slaughter>, <Laminated Effect>, <Spank Thru>, <Class of ’86><Buffy’s Pregnant>와 <Class of ’86>는 제목만 다른 같은 곡이다, <Downer>, <Blathers Log>, 그리고 제목 없는 몇몇 트랙과 연주곡, 잼과 사운드 콜라주 등이었다. 작정하고 만든 앨범이라기 보단 스케치에 가까운, 말 그대로의 ‘데모’였다.
데모의 문을 여는 <Sound of Dentage>는 자신을 괴롭히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다룬 노래다. 뭉툭한 기타 톤을 바탕에 깔고 커트는 한껏 과장된 보컬을 들려준다. 이어지는 <Reefer Madness>는 무제Untitled로도 알려진 소리 모음이다. 이 취미는 이후 《Montage of Heck: The Home Recordings》이라는 테이프로 진화한다.
댄서블 리듬과 헤비 무드가 공존하는 <Bambi Slaughter>는 너바나의 모든 곡을 분석해 책으로 엮은 작가 윌리엄 E. 스페백의 평가대로, 1942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밤비』의 주인공에게 “멜빈스의 인디 헤비메탈과 초기 헬멧Helmet의 일그러진 연주 등 에너지 넘치는 그런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 커트는 중반부터 절망적이고 가난한 사람의 생존 기술에 대해 노래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개인 소지품 판매, 할머니의 차고 급습, 약장에서 마약 찾기, 식료품점에서 담배 훔치기 등이 포함돼 있다.
《Bleach》에 넣었어도 괜찮았을 <Laminated Effect>다른 제목은 <Made Not Born>이다는 질주감 넘치는 트랙이다. 가사는 1절에서 아버지에게 성추행 당한 동성애자 이야기를, 2절에선 루시Lucy라는 레즈비언이 1절 주인공인 조니Johnny를 만나기 전까지 섹스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내용을 다룬다. 커트는 비꼬는 듯 반反동성애적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당시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배척당하거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저들이 자책해야 했던 이유를 적은 가사에선 그 태도가 반어적임을 드러낸다. 그중 특정 구절은 너바나의 <Even in His Youth>나 <All Apologies>와 연결되는 것으로도 평가됐다.
<Are You Controlled>로도 불리는 <Control>에서 커트는 학대적인 관계에 대해 긴장되고 악의에 찬 목소리로 노래한다. 특히 마지막 여자 입장에 선 듯 들리는 고통스러운 가사는 나중 <Polly>에서 커트가 맡아 열연할 악인역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커트의 저러한 역할극은 동성애자를 두들겨 패는 상남자 역할을 맡은 <Class of ’86>에서도, 보험과 관련된 법정 소송의 피고인으로 분한 <Vaseline>에서도 펼쳐진다.
<Control>을 통해 우린 커트 고유의 스크리밍을 들을 수 있다. 한편으론 불안과 혼돈을 넘나드는 숨 가쁜 진행에서 너바나의 미래도 들린다. 물론 커트 자신의 일기에 대한 언급을 중간 빠르기에 실은 <Blathers Log> 마냥, 아직은 메탈의 때가 담뿍 묻어있는 너바나다.
기타 리프에서 <Been a Son>을 예고하는 <Punk Rocker>는 펑크 록에 심취한 커트 자신의 처지와 심경에 가깝고, <Boatakk>라는 별명을 가진 <I Don’t Want You>는 커트의 당시 삐딱한 태도를 담은 또 하나 비관적인 트랙이다. 커트는 여기서 다른 사람을 개종시키려는 종교적 인간들을 뒤틀리고 병든 창법으로 매섭게 공격한다. 돈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이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여타 반종교 성향 노래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이 데모엔 9분이 넘는 곡도 있다. <Anorexorcist>로, 노래엔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함께 괴로울 신음과 포효로 가득하다. 커트가 해석한 제플린의 <Dazed and Confused>랄까. 앞서 커트가 말한 버트홀 서퍼스의 실험성과 멜빈스의 눅눅한 슬러지 그루브가 잘 버무려져 있다.
나른하게 시작해 중반부터 치고 달리는 <Accusations>는 표준에서 벗어난 입장을 취한 사람이 당면한 상황을 그린 이야기다. 커트는 여기서 자신의 신념 때문에 ‘빨갱이’ 또는 공산주의자로 불리며 정신적, 법적으로 박해를 받는 것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는 한때 블랙 플래그의 정치성을 동경했지만 정치적 가사는 커트가 계속 가져갈 방식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1992년 1월 커트는 사진작가 유리 렌케트Youri Lenquette에게 이렇게 말했다. “데드 케네디스 식 메시지에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제 방식은 절대 아닙니다.” 장난스럽게 더빙한 화음 보컬은 보완할 게 많은 당시 커트 음악 세계의 한계처럼도 들린다.
여러모로 조악하게 들릴 순 있지만 향후 너바나의 이름으로 발표될 두 곡, 즉 “자위행위에 대한 유쾌하고 경쾌한 찬가” 또는 “유쾌하고 어수선한 인디 느낌의 풍자적 모의模擬 사랑 노래”인 <Spank Thru>와 《Bleach》에 수록될 <Downer>의 느린 버전메인 기타 리프는 팽Fang의 <The Money Will Roll Right in>을 닮았다을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페컬 매터는 너바나 역사에서 중요하다. 단, 커트는 “싸구려 헤비메탈 곡”이었던 <Suicide Samurai>는 녹음하지 않았는데, 메리는 노랫말을 보고 “커트가 전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을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라고 했다. 커트의 미래에 비춰 예언 같은 추측을 한 메리는 다큐멘터리 『커트 앤 코트니Kurt & Courtney』에서 이 곡을 <Seaside Suicide>로 기억했다.
마이클 아제라드는 “페컬 매터의 데모 테이프엔 헤비한 훅 리프 등 커트의 후기 음악을 구분 짓는 몇 가지 요소를 포함해, 메탈리카 풍 스래시 템포에 멜빈스를 연상시키는 울퉁불퉁한 곡 구조도 있었다. 아직 강렬한 멜로디는 없었으되, 커트의 보컬은 거칠게 내지르거나 피를 토하듯 울부짖는 등 다양했다”라고 평가했다. 또 『NME』의 배리 니콜슨Barry Nicolson은 “커트 코베인의 청소년기 고민과 작곡가로서 성장 과정을 투박한 음악으로 기록해 놓은” 앨범으로 페컬 매터의 흔적을 평가했다. 너바나의 이후 명성 때문에 뭔가 대단한 데모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거기에 참여한 데일 크로버는 “형편없는 4트랙 데모”라고 냉정히 자평했다. 페컬 매터의 데모는 그렇게 “너바나의 유명세로 사람들이 커트가 조금이라도 관여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듣고 싶어 할 때까지” 조용히 묻힌 채로 남는다.
페컬 매터는 버즈 오스본베이스, 멜빈스의 드러머였던 마이크 딜라드Mike Dillard와 이끌어가다 딜라드가 흥미를 잃으며 약 한 달 만에 무산된 프로젝트였다. 찰스 R. 크로스는 이 밴드가 단 한 차례 공연도 못한 채 해체되었다고 썼지만, 아제라드는 자신의 책에서 1985년 12월 태평양 연안의 외딴 해변 리조트인 모클립스Moclips의 스팟 태번Spot Tavern에서 커트기타, 보컬, 크로버베이스, 호칸슨드럼의 오리지널 라인업이 멜빈스 오프닝을 섰다고 기록했다. 누구의 주장이 옳든, 에버렛 트루의 말대로 커트가 페컬 매터를 거쳐 “블랙 플래그, 레드 제플린의 록 마초이즘과 알이엠, 비틀스 같은 팝 밴드 사이 미묘한 접근”을 시도하기 위해선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