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기타보다 삽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를 좋아했던 어머니는 록을 소음으로 대하셨다. 두 분은 내가 보잉Boeing에서 볼트에 너트를 끼우는 일을 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크리스 노보셀릭
크리스 앤서니 노보셀릭Krist Anthony Novoselic은 1965년 5월 16일, 닥터 드레Dr. Dre의 고향으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주 컴턴Comp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크로아티아 이민자인 크리스토Kristo Novaselić와 마리야Marija Novaselić로, 부부는 1955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의 공산주의 통치에서 벗어나려 1963년 미국으로 이주해 가데나Gardena에 집을 마련했다. 크리스토는 스파클렛Sparkletts 생수 트럭 운전사로 취직했다.
크리스는 동생 로버트Robert Alan Novoselic와 여러 차례 집을 옮겨 다니며 살다, 1973년 여동생 다이애나Diana Novoselic가 태어났을 때 보다 나은 집에 안착했다. 크리스와 로버트는 10대 때 타이어를 찢거나 집과 차에 돌, 계란을 던지는 등 말썽을 일으켰다. 그런 자신들에게 자주 매를 든 탓에 형제는 아버지를 무서워하며 컸다. “어렸을 때 난 좀 멍청했어요. 다른 애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사람을 너무 잘 믿어 애들이 날 이용하기도 했죠. 아버지는 수시로 우릴 때리곤 했습니다.”
크리스가 열네 살이던 1979년, 노보셀릭 가족이 살기에 남부 캘리포니아 집값은 버거운 수준이었다. 알아보니 애버딘에선 같은 돈으로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애버딘엔 다른 크로아티아 가족들도 많이 살고 있어 좋았다. 가족은 애버딘으로 집을 옮겼고, 크리스토는 목재 공장 중 한 곳에 기계공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야할 건 크리스의 이름first name이다. 애버딘에서 크리스는 ‘Chris’로 불렸지만, 1992년부터 그는 크로아티아 식Krist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유는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을 시작했을 때 고국인 크로아티아에 연대하기 위해서였다. 에버렛 트루는 이에 관해 “오늘날 크리스가 유권자와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그의 부모가 살았던 조국의 격동적인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우중충한 날씨가 잦은 애버딘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점에서 캘리포니아와 정반대였어요. 날씨는 줄곧 흐리거나 비에, 거리는 트럭들이 흘린 진흙으로 얼룩져 있었죠. 건물들도 하나같이 지저분해 마치 동독의 마을 같았어요. 죄다 축축했고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 같았습니다.” 크리스에게 애버딘은 "집단 무의식 같은 것이 있는 고립된 장소"였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커녕, 자신들의 인생이나 그 어떤 것에 관해서도 잘 모르고 산다는 게 애버딘 사람들에 대한 크리스의 생각이었다.
크리스는 애버딘의 이상하고 뒤틀린 사회 분위기에 당황했고, 여기 사람들은 그저 깐깐하고 비판적인 것만 같았다. 심리적 거리감은 패션에서도 드러났다. 가령 애버딘 사람들은 가죽 테니스화에 나팔바지를 입은 반면, 크리스는 데크 슈즈Deck Shoes에 일자형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었다. 당시만 해도 애버딘에선 일자바지를 입으면 괴짜로 취급받았는데, 흥미롭게도 3년 뒤엔 모두가 크리스처럼 일자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때 키가 187센티미터였던 크리스. 크리스토와 마리야는 그래서 아들이 농구 선수가 되길 바랐다. 크리스는 부모님 뜻에 따라 처음엔 농구를 했다. 허나 스포츠는 조직 생활이 필수인 분야인지라, 학교생활조차 적응하지 못했던 크리스에게 농구 선수는 생업으로선 무리였다. 커트에게 그랬듯 크리스에게도 가장 좋은 친구는 음악이었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었어요. 녀석들은 나를 정말 심하게 대했죠. 이해가 안 됐어요. 그냥 쿨하지 못한 애들이었습니다. 농구공을 놓은 건 키스의 라이브 앨범 『Alive!』를 사면서였는데, 그때부터 내 인생이 바뀌었어요. 이후 집에 있으면 오후 내내 자거나 혼자 음악을 듣곤 했어요.”
또래 친구들이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흘러나오는 인기 팝송을 좋아할 때 크리스는 레드 제플린, 데보Devo, 블랙 사바스, 에어로스미스에 열광했다. 때문에 학교 버스 라디오에서 나오던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의 <Coward of the County>를 크리스는 몇 차례고 견뎌야만 했다. 크리스의 집은 애버딘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씽크 오브 미 언덕Think of Me Hill-세기의 전환기에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던 ‘씽크 오브 미(THINK OF ME)’라는 시가cigar 광고 간판에서 온 이름에 있어 라디오 수신이 좋았고, 맑은 날에는 포틀랜드 방송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방에 우울하게 누워 라디오로 시애틀의 최신 유행 록 방송을 몇 시간이고 듣곤 했다.
1980년 6월, 크리스토와 마리야는 아들의 우울증이 걱정돼 크로아티아에 있는 친척집으로 크리스를 보냈다. 크리스는 거기서 크로아티아어를 배웠고 이내 유창해진다. 애버딘에서와 달리 그는 학교생활에도 만족하며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이때 크리스는 펑크 록이라는 음악을 처음 들었다. 섹스 피스톨스, 라몬스는 물론 유고슬라비아 펑크 밴드들까지 두루 섭렵한 그는 섹스 피스톨스 음악에 대해 92년 1월(『선 헤럴드Sun Herald』) 이렇게 말했다.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는 완전히 팝적인 앨범으로, 일단 노래가 훌륭하고 날것 그대로이며 매우 반항적이었어요.” 1년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는 2004년에 낸 자서전 『Of Grunge and Government, Let’s Fix This Broken Democracy』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유고슬라비아에는 훌륭하고 다양한 음악을 가진 자생적인 신scene이 있었다. 반면 애버딘은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어 펑크가 자리 잡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주류 헤비메탈의 매끈한 통조림 같은 사운드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자신을 괴물 취급하는 애버딘 아이들의 어리석음에 좌절감을 느낀 크리스는 술을 마시고 대마초를 피우기 시작했다. 특히 술을 마시면 무엇이든 가능할 듯 느껴졌고 모든 게 이해가 됐다. 만화 속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크리스는 술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에게 술은 다른 현실, 다른 의식 세계였다. 맷 루킨은 크리스를 이렇게 기억했다. “크리스는 파티에 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등 늘 이상한 짓을 해서 사람들은 그를 괴짜로 알고 있었어요. 함께 어울리는 애들이 몇 있었지만 친구라 부르긴 어려웠죠.” 크리스는 그저 갈 곳이 없었기에 그들과 어울렸을 뿐이다. 결국 이상하고 불편한 ‘친구 아닌 친구’들과 관계를 등지고 그는 동네 타코벨Taco Bell에서 매일 야간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음악을 하기 위해서였다.
열심히 일한 크리스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자동차와 스테레오 스피커, 기타를 샀다. 그는 동생 로버트와 함께 커트를 가르친 워렌 메이슨에게 레슨을 받았다. 크리스는 워렌에게 블루스를 연주하고 싶다고 했다. 침실에서 동생과 해묵은 비비 킹B.B. King 앨범에 맞춰 기타 연습에 들어간 크리스. 하지만 블루스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레슨은 몇 달을 못 갔다.
크리스는 타코 벨에서 빌 헐Bill Hull과 함께 일했다. 빌은 학교 온실에 파이프 폭탄을 설치했다 애버딘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인물로, 그는 몬테사노 고등학교로 전학해 버즈 오스본과 맷 루킨을 친구로 사귀었다. 크리스는 그런 빌을 통해 버즈와 맷을 처음 만났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방과 후 일하던 패스트푸드점에서 둘을 만났다고 보다 자세히 나와 있다. 버즈는 1982년 몬테사노 학교 신문『The Vidette』에서 펑크 록을 전도하고 있었는데, 해당 신문엔 펑크 록이 기존 로큰롤보다 우월한 이유에 대한 버즈의 칼럼이 있었다고 한다. 크리스와 정치 이야기를 나눈 버즈는 바이브레이터스Vibrators, 섹스 피스톨스, 플리퍼, 블랙 플래그, 서클 저크스Circle Jerks를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1992년 호주 라디오 방송국과 인터뷰에서 크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버즈는 전도사였고, 그의 복음은 펑크 록이었어요. 버즈는 사람들을 펑크 록에 빠져들게 하는 걸 넘어 그 사운드를 직접 라이브로 들려주었죠.” 다만 옛 펑크 록은 너무 라이브처럼 들려 크리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크리스가 펑크에 마음을 빼앗긴 건 버즈를 만나고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플리퍼의 《Album – Generic Flipper》를 듣고 ‘이건 예술이다’ 싶었다. 나에게 그 앨범은 레드 제플린 4집이나 비틀스의 화이트 앨범과 같았다. 그건 계시였다.”
플리퍼로 펑크의 맛을 본 크리스는 샌프란시스코의 『맥시멈 로큰롤Maximum Rocknroll』 같은 팬진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MDC 같은 정치적 하드코어 펑크 밴드를 발견해 나갔다. 샌프란시스코의 『서치 앤 디스트로이Search & Destroy』와 『데미지Damage』, LA의 『슬래시Slash』와 『플립사이드Flipside』, 미시간 주 랜싱Lansing의 『터치 앤 고Touch and Go』, 보스턴의 『포스트 익스포저Forced Exposure』, 뉴욕의 『펑크Punk』 등 성장하는 펑크 신을 위한 중요 소통 수단이었던 당시 팬진을 크리스는 “80년대 초의 블로그”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그 시대 팬진들은 음악 외 정치적 내용도 많이 다뤘다. 아울러 반기득권 성향이 강했고 채식주의와 마약 없는 삶, 반기업 정서를 옹호했다. 요컨대 주류 미디어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독립적이고 탈중앙화 된 매체가 팬진이었다. 크리스가 팬진을 접하고 아나키즘과 동물권Animal Rights에까지 관심을 뻗친 이유다.
팬진을 통해 버트홀 서퍼스, 마이너 스레트, 허스커 두까지 접한 크리스는 맷 루킨의 차를 타고 펑크 록 공연을 보러 두 시간 거리 시애틀까지 가곤 했다. 1984년 한날엔 버즈, 맷과 함께 얼룩말처럼 도색된 68년식 폭스바겐 밴을 타고 블랙 플래그 공연이 열린 워싱턴 왈라왈라Walla Walla에도 갔다. “그렇다고 모호크 머리를 하거나 스터드Stud 장식이 달린 가죽 재킷을 입진 않았어요. 에어로스미스, 레드 제플린의 음반도 버리지 않았죠.” 크리스가 커트를 만난 건 이 무렵이었다. 동생 로버트가 친구인 커트를 집으로 데려오면서다. 커트가 로버트에게 위층 시끄러운 소리에 대해 묻자 로버트는 “우리 형이야. 요즘 펑크 록에 꽂혀서”라고 대답했다. 커트는 친구 형의 음악 취향이 만족스러웠고 따로 기억해두었다. 대중에겐 베이시스트로 유명하지만 크리스는 이 시기 기타를 쳤다. 커트의 친구 제시 리드와도 알고 지낸 크리스는 <Wattage in the Cottage>, <Samurai Sabotage>, 자살한 애버딘의 소년을 조롱하는 노래 <Ode to Beau> 등 커트가 작곡한 곡을 셋이서 기타로 연주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어느 날, 크리스는 학교 복도에서 섹스 피스톨스 앨범에 열광하는 후배 여학생 두 명 뒤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크리스의 여자 친구가 될 셸리Shelli Hyrkas였다. 셸리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맥도날드에 취직해 월세 100달러짜리 아파트를 얻었다. 크리스는 8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뒤 “제이 레노Jay Leno-미국 TV 진행자 같았던” 주걱턱 교정 수술을 받는다. 출근길에 크리스가 일하던 회사Foster Painting Company를 지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셸리는 미래 남편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연락을 텄다. 학창 시절 ‘별난 아이’였던 둘은 85년 3월부터 셸리의 아파트에서 함께 펑크 록 음반을 듣고 공연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둘은 곧 사귀었다.
크리스의 밴드 역사는 복잡하다. 한번은 멜빈스의 드러머였던 마이크 딜라드, 버즈 오스본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는데 이때 크리스는 기타를 쳤고 버즈는 베이스를 맡았다. 크리스는 데일 크로버(드럼), 커트(기타), 마이크 딜라드(드럼), 버즈 오스본(보컬)이 포함된 멜빈스의 위성 프로젝트 스티프 우디스의 회전문 라인업에도 발을 담갔다. 아제라드의 책에선 크리스가 리드 보컬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보컬 실력은 훗날 <Territorial Pissings>의 도입부에 카메오로 출연한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커트는 당시 자신들의 사운드를 “버트홀 서퍼스처럼 들렸다”고 주장했다. 크리스는 애버딘의 D&R 극장D&R Theatre에서 열린 멜빈스/메탈 처치 합동 공연의 오프닝 무대에 멜빈스 멤버들과 함께 올라 크림의 <Sunshine of Your Love> 펑키 버전을 연주하며 실전 경험을 쌓기도 했다.
또 다른 멜빈스 사이드 프로젝트인 멘터스The Mentors-1976년 시애틀에서 결성된 헤비메탈 밴드 커버 밴드에서도 크리스는 베이스를 연주했다. 이때 크리스는 필 아티오Phil Atio라는 예명을 썼다. 크리스는 당시 직장에서 해고돼 주당 55달러 실업급여를 받고 있었다. 보통 아침 내내 잠을 자고 오후마다 멜빈스 연습실에서 놀았던 크리스는 자연스레 셸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두 사람은 TV와 전화 없는 세간을 모두 중고로 구입했다. 동거를 하며 대부분 시간을 여자 친구와 보낸 크리스는 멜빈스의 연습실을 뜸하게 찾는다. 크리스와 셸리는 크림과 롤링 스톤스의 초기 음반을 듣곤 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멋진 시기였어요. 모든 게 너무 새로웠고 밝았죠.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사니 세상이 다 우리 것 같았어요.” 셸리는 남자 친구와의 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커트는 완전히 창의적인 인물,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다소 엉뚱한 곡을 썼다. 펑크 또는 팝, 무엇이 됐든 그것은 날것의 창의성이었다.
크리스 노보셀릭
겉도는 느낌으로 밴드를 전전하던 크리스가 커트와 팀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페컬 매터의 데모 테이프를 듣고서였다. 크리스는 특히 <Spank Thru>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펑키한 레드 제플린’을 위한 첫 제안은 커트가 했다. 사실 커트는 크리스를 만난 이후 줄곧 밴드에서 함께 연주할 사람을 원한다고 말했지만 크리스는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커트는 크리스에게 일주일 동안 자신의 피비Peavey 앰프를 빌려주며 설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크리스는 커트의 제의에 응하지 않았고, 심지어 커트가 자신의 앰프를 찾으러 집에 찾아오게까지 만들었다. 페컬 매터 테이프를 녹음한 지 1년, 처음 만난 지 3년이 지나고서야 크리스는 마침내 커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네가 준 테이프를 이제야 제대로 들어봤어. 꽤 좋더라. 우리, 밴드 하자.” 커트는 실링거 네서 페컬 매터의 데모 《Illiteracy Will Prevail》 사본을 몇 개 더 만들어 지인들에게 돌린 터였고, 크리스의 손에 간 것도 그중 하나였다. 흔히 알려진, 크리스가 살던 집 아래층에서 들려온 커트의 <Spank Thru> 연주에 반해 처음 밴드 결성을 마음먹게 되었다는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다.
멜빈스가 하룻밤 공연에 80달러라는 거금을 받은 사실에 주목한 크리스와 커트. 이때 둘이 결성한 팀이 CCR 커버 밴드 셀아웃츠였다. 셀아웃츠 포지션은 조금 독특했는데 커트가 드럼을 치고, 크리스가 기타를 쳤다. 베이스는 스티브 뉴먼Steve Newman이라는 친구에게 맡겼다. 크리스와 셸리 네서 한 셀아웃츠의 리허설은 그러나 5~6회에서 그쳤다. 커트와 뉴먼이 크게 싸웠기 때문이다. 포지션도 들쑥날쑥, 커버 밴드에 생명력도 짧았지만, 중요한 건 커트와 크리스가 계속 한 팀에 머물고 있는 일이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이 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20대 초반에 읽은 크리스는 파티에서 사회주의에 관해 논했을 정도로 이미 정치에 민감한 성향을 드러냈다. 아울러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났던지라 크리스는 이후 너바나와 언론 사이 유일한 소통 역할을 맡는다. “크리스는 느긋하고 현실적인 너바나의 홍보대사였어요. 커트의 부담을 덜어주었죠.” 서브 팝의 영국 홍보 담당자였던 안톤 브룩스Anton Brookes의 말에 작가 마이클 아제라드는 이렇게 덧붙인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하는 크리스는 책을 통해 배운 지적인 타입은 아니지만, 상대의 헛소리를 꿰뚫어보는 직관력을 갖춘 천재적인 말 센스를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