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일관성이 없다”는 혹자의 평가를 앞세워 엔믹스에 관해 내가 쓴 글들은 거의가 쓴소리였다. 대중보단 마니아를 전제한 기획을 아쉬워했고, 소녀시대의 ‘I Got a Boy’와 에스파의 ‘Next Level’에 견주며 “하룻밤 공부로 모든 커리큘럼을 벼락치기하려는 그룹”으로 평가한 영국 매체 NME의 지적을 데뷔곡 ‘O.O’에 인용했다. 또한 잠재력에 비해 결정타를 터뜨리지 못한 이들이 데뷔한 2022년은 뉴진스와 아이브의 해였다고도 했다. 좀 더 힘을 빼고 이들의 장점을 부각할 순 없을까. 더 많은 대중과 친해질 수 있는 그런 음악을 원했더니 2025년 가을, 엔믹스는 정말 그런 음악을 들고 왔다.
가사는 팬들을 위한, 대중을 위한 것이니까요.
해원의 저 말을 나는 음악에까지 가져가고 싶다. 저 발언의 핵심은 ‘대중’이다. 그 언급엔 대중을 위한 음악을 하리란 그룹의 의지가 있다. 이번 작품을 ‘너(You)’라는 한마디로 정의한 배이는 거기에 “감정의 교류와 연결”을 더했다. 즉 엔믹스는 엔서(NSWER)를 넘어 대중에게 더 다가가겠다는 자신들 의지를 사랑 이야기라는 보편성에 실은 셈이다. 릴리의 말을 빌리면 “현대 사랑의 현실 묘사”에 엔믹스의 그 대중성은 기대 있다.
물론 사랑에는 규진이 좋아하는 ‘Shape of Love’가 대표하듯 희망과 믿음만 있는 건 아니다. 배이가 가장 좋아한다는 ‘SPINNIN’ ON IT’이 들려주듯 거기엔 상처와 증오, 싫증도 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테마는 엔믹스가 성장해 온 과정을 상징한다. 첫 정규 앨범 제목이 ‘우울한(blue) 밸런타인’인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쉬운 벌스(verse), 템포를 이지러뜨리는 프리 코러스, 펑크(punk)로 솟아오르는 메인 코러스. 타이틀 트랙이자 첫 곡 ‘Blue Valentine’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팝 팬들의 심장을 겨눈다. 타이틀 트랙은 앨범의 얼굴이고, 대부분 첫 곡은 작품의 첫인상이다. 이들이 타이틀 트랙을 첫 곡으로 삼았다는 건 그래서 초반에 승부를 보겠다는 뜻이다. 시작부터 한눈팔지 못하도록 당신들을 부여잡겠다는 그룹의 강력한 뜻이다.
일단 쉬워지려 노력한 눈치다. 그렇다고 3년간 쌓은 자신들의 고유성을 버리지도 않았다. 현란한 구성 사이에 쉬운 멜로디를 앉혀 현란함이 과시로만 치닫지 않도록 했다. 음악의 겉옷인 비트와 리듬은 꺾이고 치받는 대신 보듬어 들썩인다. 고집과 타협의 공존 속에서 엔믹스의 음악은 성숙을 일구었다. 마니아와 대중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음악이 어떤 것인지, 그룹은 자신들이 깨달은 내용을 듣는 이에게 되물으며 그 깨달음이 헛것이 아님을 증명해 낸다.
한 곡 한 곡이 정성스럽다. 허투루 들을 곡은 없으리라는 듯 노래들은 하나하나가 다부지다. 12 트랙 중 듬성듬성 포인트를 심어 두고 자칫 앨범이 느슨해질 여지를 미리 막아두었다. 가령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처럼 성큼 들어서는 일렉트로닉 비트와 에스파를 떠올리게 하는 뱀 같은 베이스를 엮은 ‘Reality Hurts’는 포인트 중에서도 돋보인다. “‘Reality Hurts’ 작사에 참여할 때 엔믹스의 전체 에너지를 담아내려 노력했어요.” 릴리의 노력은 가사뿐 아니라 음악 전체까지 뻗친 느낌이다.
정규 앨범의 호흡은 지루함이 없어야 한다. 싱글이 3~4분의 세계를 장악해야 하는 것과 같게, 앨범은 10 트랙 안팎에 끊임없는 긴장을 심어 환상적인 파열을 노려야 성공할 수 있다. 엔믹스의 정규 데뷔작에서라면 ‘RICO’와 ‘Game Face’가 중간을, 규진의 재즈 취향이 반영된 ‘Crush on You’와 ‘Shape of Love’가 꼬리를 지탱하고 있는 식이다. 이 단단한 트랙 사이 직조는, 두 파트로 나눈 데뷔곡 ‘O.O’가 데뷔 3주년을 돌아보고 앞날을 추동하는 마지막 순환의 얼개를 만나 다시 출발선에 선다. 노랫말에 이들의 기존 곡(‘Roller Coaster’)이 숨은 ‘Blue Valentine’도, 우린 (엔믹스라는) 팀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가사를 가진 ‘PODIUM’도 모두 그 순환하는 출발에 힘을 실어준다.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만 취한 엔믹스의 쇄신. 부디 이대로만 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