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유나가 맞았다. 89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 곡 ‘사랑이라는 건’으로 데뷔해 ‘너를 사랑하고도’로 커리어 정점을 찍은 가수. 그는 슈퍼스타까진 아니더라도 누구나 인정한 당대의 스타였다. 검증된 자질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다. 그런 사람이 ‘무명가수’를 전제한 ‘싱어게인 4’에 4호 가수로 나와 노래를 불렀다. 선곡은 역시 자신을 대표하는 ‘너를 사랑하고도’였다. 목은 예전 같지 않았고 전유나는 결국 떨어졌다.
이 글은 ‘싱어게인 4’에 대한 감상문도, 프로그램 리뷰도 아니다. 그저 저 프로그램이 묶은 두 조에 관한 의견이다. 두 조란 재야의 고수 조와 슈가맨 조다. 전유나는 슈가맨 조에 속했다. 사실 그전에 나는 재야의 고수 조에서 이미 한 번 놀란 상태였다. 정순용(51호 가수) 때문이었다. 아니, 정순용이 재야의 고수라고? ‘공항 가는 길’의 마이 앤트 메리. 그 팀의 프런트맨이자 메인 송라이터가? 김동률이 프로덕션에 참여했고 조원선(롤러코스터)이 피처링 한 토마스 쿡(정순용의 솔로 활동 명)이?? 그가 통기타 한 대 들고 나와 부른 ‘코뿔소’(한영애)의 절박함은 마치 그의 현실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 저 정도로 힘들게 음악을 해온 것인가. 정녕 현실을 이길 수 있는 예술은 없는 건가. 실력과 상관없는 인지도의 압박 아래 시름시름 앓아가는 인디 음악가들의 서글픈 자화상이 정순용의 퍼포먼스에서 구구절절 읽혔다. 뒤에 출연한, ‘일종의 고백’을 듣고 본 사람들 가슴에 먹먹한 파문을 일으킨 이영훈(55호 가수)의 무대는 그 서글픔의 또 다른 실체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왜 저들이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 저런 식으로 소비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같은 업계 사람들의 심사 이전에, 대중과 평단에게 이미 인정받은 저들이 왜 ‘무명’으로 간주되어 이런 상황에까지 몰렸느냐에 관한 숙고다. 이건 정순용과 이영훈과 자두가(50호 가수) 1라운드를 통과한 걸 축하하는 일보단, 전유나가 동시대에 활약한 심사위원장 윤종신의 위로를 받으며 씁쓸하게 퇴장한 일을 짚어보자는 취지에 더 가깝다. 솔직히 저들은 참가자 무대가 아닌, 심사위원석에 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 아닌가. 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맞다. 저들은 자신이 원해서 출연했다. 더 나은 인지도를 위해, 이대로 잊히고 싶지 않아서 저마다 이를 악물고 나온 것일 테다. 어쩌면 한 번 더 유명해지고 싶은(또는 한 번이라도 유명해져보고 싶은), 자신이 유명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심사위원 코드 쿤스트의 말처럼 전유나와 정순용은 그런 의미에서 똑같이 “다시 한번 노래와 음악을 통해 살아가고 싶은 참가자들”이었다. 네미시스의 프런트맨 노승호(69호 가수)가 “꺼져 가는 불씨를 살려준 것”이라며 김이나의 슈퍼어게인에 눈시울을 붉힌 것도 결국엔 같은 맥락이다. 심사위원과 참가자, 시청자들 마음은 그 마음, 그 드라마가 펼쳐질 때마다 하나 되어 무너졌다.
때문에, 자신들이 필요해 선 무대를 두고 이런 간섭은 주제넘은 ‘오지랖’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나 다시 생각해 봐도 저들은 저렇게만 소비되기엔 아까운 재능이다. 전유나의 경우 다른 출연자, 심사위원의 어머니들이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의 주인이었다. 나는 바로 그 어머니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일지 모른다. 당신들의 스타가 이렇게 오디션 프로그램에 몰려 심사를 받고 심지어 떨어지기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나는 어머니들이 “아니요!” 하고 말해주길 원한다.
찐 무명 조의 실력만 봐도 ‘싱어게인 4’가 가려는 길, 주제는 뚜렷하다. 실력은 있지만 인지도가 얕은 ‘무명’들의 무대. 제2의 이승윤, 이무진을 발굴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기본 취지는 누가 봐도 명백하다. 반면 슈가맨들은 유명했고, 지금도 나오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 오디션이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려면 저들의 출연엔 분명 어색한 면이 있다. 로커가 되고 싶어 음악을 시작했다는 자두의 사연, 한때 천재로 불리며 ‘마마보이’, ‘너를 품에 안으면’을 써낸 김준선(7호 가수)이 ‘아라비안 나이트’를 부르고 합격 보류에 머무는 모습은 그들의 화려했던 과거를 아는 입장에선 안쓰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알고 있다. 슈가맨 조가 이 오디션의 ‘예능’을 위한 핵심 장치라는 걸. 저들의 등장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어떤 식으로든 반가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는 특정 세대 시청자의 환호는 그대로 시청률에 반영된다. 비슷한 성향을 지닌 OST 조와 슈가맨 조는 제작하는 입장에선 버릴 수 없는 카드인 셈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재야의 고수 또는 슈가맨 조의 적절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굴 심사하는가’에 대한 꽤 오래됐고 여전히 첨예한 논쟁을 들추기 위한 것 역시 아니다. 다만, ‘싱어게인 2’에서 김현성의 ‘Heaven’을 듣고 펑펑 운 규현이 말한 대로 “심사위원이라는 직책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싱어게인’에 나오는 가수 분들의 팬으로서 행복하다”는 말을 곱씹어보자는 의미에서 써본 글이다. 나는 규현의 말에 100퍼센트 공감한다. ‘싱어게인’은 “심사위원이 출연자의 팬”일 수 있는 오디션이다.
전유나의 자조처럼 현세대에게 그는 ‘무명가수’일지 모른다. 오해 말자. 나는 지금 MZ 또는 잘파 세대를 향해 전유나를 알아달라 호소하는 게 아니다. 저들은 ‘너를 사랑하고도’를 몰라도 되고, 모르는 게 당연하다. 내가 두 손 모아 바라보는 집단은 전유나와 자두, 김준선을 스타로 기억하는 세대다. 토마스 쿡과 이영훈의 음악을 듣고 그들의 밝은 미래를 빌어준 팬들이다. 당신들이 그토록 좋아한, 지금도 어딘가에서 재생하거나 따라 부르고 있을 노래의 주인공. 아직 부를 수 있고 부를 의지가 있는 저들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일. 그들에게 맞는 무대를 선물하는 것. 나는 그 일을 여러분의 관심이 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저들의 ‘어게인’은 당신들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