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자우림
강한 자가 버티는 게 아니다. 버틴 자가 강한 법이다. 그 밴드 하기 힘들다는 나라에서 자우림은 무려 28년을 버텼다. 트로트와 아이돌 케이팝이 양분하는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록 밴드가 30년 가까이 버텼다는 건 쉽게 말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음악과 연주 수준, 대중의 지지, 멤버 간 결속력이 받쳐줘야 해낼 수 있다. 앨라니스 모리셋, 돌로레스 오리오던, 시네이드 오코너를 품고 팀 중심에서 팀의 상징이 된 김윤아. 그가 이끄는 자우림은 저 모든 요소를 갖추었고, 끝내 해냈다.
자우림의 음악을 한마디로 푼다면 ‘밝고 명랑함을 가장한 핏빛 로큰롤’이다. 웃음 뒤에 슬픔을, 상냥함 뒤에 냉소를 숨긴 음표들로 자우림은 자신들만의 록을 정의 내렸다. 그들은 뮤지컬 같은 화려함을 들려주다가도 곧장 우울과 외로움을 향해 직진할 수도 있는 밴드다. 표현 반경이 그만큼 넓다는 얘기이고, 어지간히 노련해야 할 수 있는 음악이다. 신나는 ‘라이프!’로 문을 열어 끈적한 ‘콜타르 하트’로 문을 닫는 이번 작품의 구조 역시 그 표현력과 노련함의 반영이라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플 이야기다.
춤과 조명의 절박한 콜라보가 장관을 이루는 ‘라이프!’ 뮤직비디오가 보여주듯, 김윤아는 이번 앨범 전반부에서 개인 내면의 전쟁을 다루었다고 했다. 막연한 희망만 얘기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내놓지 못하는 ‘힐링팔이’의 허점(‘라이프!’), 단 한 번 실수로 나락에 빠뜨리는 현대사회의 여론 재판(‘마이 걸’)이 그 안에서 제시된다. 이어 템포를 떨어뜨리는 ‘스타스’가 그 전쟁의 결론을 ‘사랑하는 것’으로 짓고 나면 앨범은 사회라는 또 다른 전쟁터를 우리 앞으로 데려온다. 리듬을 휘고 젖히거나 부수며 드러머 염성길의 진가를 드러내는 ‘렛 잇 다이’, 세계적인 헤비메탈 밴드 메가데스의 97년 곡 ‘I’ll Get Even’이 떠오르는 김진만의 각진 베이스가 음악에 군복을 입힌 ‘유겐트’가 여기에 든다. 이처럼 자우림 신보는 개인과 사회를 놓고 안팎으로 전투를 치르는 음악인 동시에,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들(아테나와 바쿠스)에 빗대 나 또는 우리의 전쟁과 평화를 논하는 작품이다. 즉 ‘삶’을 화두로 잡은 사유의 폭이 내 안에서 인류의 미래까지 번져나가는 콘셉트 앨범인 셈이다.
30년 가까이 흘러온 밴드라면 레트로라는 문화 유행도 자기들 음악 안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법. 그렇게 ‘마이 걸’로 자신들이 태어난 90년대 얼트 록 사운드를 충실하게 들려주는 듯싶다가 타이틀 곡 ‘라이프!’를 비롯해 신스팝에 적신 로큰롤 트랙 ‘카르마’, 자우림 식 ‘그대에게’(무한궤도)라고 불러도 될 ‘아테나’에서 눈치 보지 않고 길어 올리는 팝 센스는 또한 이 팀의 능수능란함을 엿보게 한다. 아울러 이기 팝(Iggy Pop)에서 밴드 제트(Jet)로 이어진 모타운 풍 업비트를 입힌 ‘바쿠스’처럼 뭔가 들떠 있다가도, 박찬욱의 ‘박쥐’를 음악으로 빚은 듯한 ‘뱀파이어’(기타 톤에서 스매싱 펌킨스가 떠오른다) 마냥 김윤아의 물오른 노래 연기(演技) 아래 가라앉기도 하며 앨범 ‘Life!’는 듣는 이를 쉼 없이 들었다 놨다 한다.
그런 작품 속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이선규의 기타 솔로다. 그의 솔로는 정말이지 매곡에서 폭발한다. 마치 그동안 쓰고 싶었던 이펙터, 치고 싶었던 프레이즈를 모조리 쏟아내는 느낌이다. 명성이 아깝지 않은 애비로드(Abbey Road Studios) 표 사운드와 함께 이선규의 저 팔색조 연주는 그간 김윤아에게만 쏟아져온 자우림의 스포트라이트를 수시로 흩뜨린다.
사람들은 흔히 록 하면 저항을 떠올린다. 음악에서 저항은 힙합도 하고 재즈도 할 수 있지만, 강도와 밀도 면에서 저항의 상식은 언젠가부터 록의 몫이 됐다. 중요한 건 록도 저항도 결국 사람이 한다는 것. 자우림 12집은 그 사실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앨범이다. 거친 록 사운드로 저항하는 끝에 인간이 있고, 그들 삶이 있다. 김윤아가 이번 앨범을 두고 분노와 위로를 함께 언급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