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민음사
뵐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폭력' 즉, 언론의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정관리사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근검절약으로 아파트까지 소유하고 있는 스물 일곱 살의 이혼녀 카타리나 블룸의 개인 명예가 언론의 폭력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고, 그 결과 그녀가 기자를 살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살해라는 '눈에 보이는 명백한 폭력'을 초래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폭력'을 다루는 것이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이 소설의 부제는 이미 작품의 주제를 시사하고 있다 - 작품 해설 中
무비판적으로(또는 일방적으로) 언론에 이끌리는 여론은 언제나 위험하다. 한 번 여론이 언론에 이끌리기 시작하면 '권력'을 가지게 되는 언론은 왜곡과 추정, 가정이라는(사실과는 거리가 먼 온갖 잡다한)방식으로 개인과 집단을 괴롭히게 되는데 이른바 '언론 폭력' 또는 '폭력 언론'이다.
남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 아니므로 한 사람(그리고 집단)의 명예를 짓밟는 선정적인 기사는 언제나 인기가 있다. 인기가 있다는 것은 팔린다는 얘기이고, 어차피 하나의 이익집단일 뿐인 그들 언론사는 그깟 '인기'를 위해 때론 목숨보다 중요한 '인권'을 포기한다. 물론 현명하지 못한 여론은 그런 언론을 믿고 지지한다.
그러므로 언론의 폭력은 곧 여론의 폭력일 수 있다. 언론을 대충 보고 읽은 뒤 그것을 전적으로 믿음으로써 어떤 개인과 집단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집단 폭력인 셈이다. 팔기 위해 쓴 기사를 사서 읽는 것은 경제학적으로야 지극히 당연한 행위겠지만, 문제는 읽은 뒤의 판단이다. 이것은 한 인간을 죽이기 위한, 명백히 날조된 것임을 상식적 수준에서도 알 수 있는 기사에도 사람들은 이미 확립된 언론의 권위에 맞서지 못하고 그 날조된 기사를 사실로 판단, 명백한 피해자를 명백한 피의자로 만들어버린다. 믿어버리는 순간에 정의는 왜곡되고 언론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게되는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은 허구의 이야기 속 개인이지만 그는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다. 또는 이 세상 모두일 수도 있다.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다운 언론조차 대중들에 의해 검증받고 비판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거짓과 왜곡을 장기로 하는 '황색 언론'의 선정 기사가 사회의 진실이 되고 세상의 정의가 되어서야 하겠는가. 많이 읽히는 '양'과 그 매체의 '질'은 별개 문제다.
언론은 자료로서 족하다. 사실을 전해주고 그 사실에 대한(사설이나 칼럼같은) 약간의 의견 가미로 그들의 할 일은 끝이 나야 한다. 언론이 판단을 하고 판정을 해서는 곤란하다. 기사에 대한 판단은 그것을 읽고 보는 개인들이 하는 것이고, 기사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분별력을 갖춘 독자의 역량(또는 자세) 역시 개인들이 쌓아야 하는 것이다. 굳이 그래야 한다면 여론이 언론을 지배해야 한다. 여론이 언론을 비판하고 감시하고 채찍질 해야한다. 언론이 여론을 지배하는 지금 이 사회를 보라. 언론 신뢰도가 세계 최고라는 일본 사람들만 봐도 내 눈엔 '살아있는 좀비'가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