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개국 이래 음악을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꾼 엠티비(M-TV). 하지만 89년, 단순한 비디오 클립만으로는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엠티비의 한 스탭이 「If We Ever Meet Again」(1988)으로 유명한 Reckless Sleepers의 프론트맨 Jules Shear에게 “뭐 괜찮은 아이템 좀 없을까?” 조언을 구했고, 마침 어쿠스틱 기타만으로 노래하는 앨범을 제작하고 있던 그의 머리에서 ‘전기를 쓰지 않는 스튜디오 라이브’라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바로 우리가 아는 언플러그드(Unplugged)의 시작이다.
Hall & Oates와 Allman Brothers Band까지 날 것(Acoustic)의 음악에 심취하게 만든 이 매력적인 기획은 이후 Mariah Carey와 Nirvana, Mr.Big과 Extreme 등에까지 손을 뻗으며 콘센트를 뽑는 콘셉트로서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 앨범은 그런 언플러그드가 생긴 지 3년 뒤인 1992년 Eric Clapton의 공연을 담은 것으로,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서였는지 로얄 앨버트 홀 공연과 영화 《리쎌웨폰 3》(1992) 사운드트랙 작업 등 정력적인 활동을 마친 뒤 예정했던 2개월 전미 투어에 오르기 전 응한 무대이다.
Fourplay의 Nathan East (베이스), Tom Petty와 Johnny Cash를 보좌했던 드러머 Steve Ferrone, George Harrison과 Billy Joel이 신뢰했던 퍼커셔니스트 Ray Cooper, Allman Brothers Band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Chuck Leavell(키보드), 그리고 Katie Kissoon과 Tessa Niles가 백킹 보컬을 맡은 이 공연은 Eric Clapton이 15~6세 때 즐겨 들은 블루스 곡들을 중심으로 연주곡 「Signe」, 향후 자신의 음악 방향을 가늠케 한 「Tears In Heaven」과 「Lonely Stranger」, Pattie Boyd에게 바친 러브송 「Layla」, 『Journeyman』(1989)에 수록하기 위해 Robert Cray와 함께 쓴 「Old Love」가 더해져 세트리스트가 완성되었다.
57년 Bo Diddley가 썼고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도 커버한 바 있는 「Before You Accuse Me」로 앨범은 진정한 막을 올린다. 어릴 때 들을 땐 잘 몰랐는데 블루스라는 장르가 Eric Clapton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이가 조금 들어 다시 듣는 두 번째 곡은 23년 전 들었던 그 두 번째 곡과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어지는 곡 「Hey Hey」는 Muddy Waters와 Charlie Patton, Eric Clapton이 존경하는 Robert Johnson까지 매료시킨 델타 블루스맨 Big Bill Broonzy의 50년대 명곡으로 클랩튼은 원곡의 흙냄새를 간직해내기 위해 기타에도 노래에도 욕심을 버리고 여유를 묻혔다.
원곡 보존을 위한 의지는 Jimmy Cox의 「Nobody Knows You When You’re Down and Out」에서도 계속 된다. Derek and The Dominos 시절에도 커버했던 이 곡을 Clapton은 이 실황에서 다시 꺼냈는데 일렉트릭 블루스로 요리한 지난 시도와는 달리 여기에선 Bessie Smith가 부른 오리지널에 다가가기 위해 그 자신이 제법 섹시하게 노래하고 있다. Chuck Leavell의 피아노 연주가 심각하게 아름다운 곡이다.
「Old Love」와 함께 『Journeyman』에 실렸던 Jerry Lynn Williams의 「Running on Faith」. 도브로(Dobro) 기타로 한껏 멋을 낸 연주는 먼저 간 친구 Duane Allman에게 바치는 것(“Duane이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연주했을 것이다” – 에릭 클랩튼)이다. Katie와 Tessa의 마지막 화음이 둘의 우정을 더 먹먹하게 만든다.
델타 블루스 거장 Son House가 작곡하고 클랩튼의 우상 Robert Johnson이 유행시킨 「Walkin’ Blues」의 짧은 운치가 지나고 나면 A-A-B 구성의 전형을 따른 트래디셔널 컨트리 블루스 넘버 「Alberta」가 흐른다. 슬라이드 바를 손에 끼운 채로 12현 마틴 기타를 연주하려던 클랩튼의 몸개그가 장내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와중 스티브의 차분한 셔플 비트와 척의 랙타임 피아노가 가세, 사람들 마음을 봄 눈 마냥 녹아내리게 했다.
마치 CCR의 연주를 듣는 듯 찰랑거리는 기타 인트로가 흥겨운 Jesse Fuller의 59년 곡 「San Francisco Bay Blues」가 곧바로 이어진다. Phoebe Snow를 스타로 만들어준 곡이지만 Clapton은 원작자의 원 맨 밴드 스타일에 좀 더 충실하며 Muddy Waters의 끝 곡 「Rollin’ and Tumblin’」에 앞서 관객들의 박수와 호응(또는 흥)을 이끌어냈다. 공연은 그렇게 무르익으며 막바지로 치닫는다.
언제 어디서든 ‘Robert Johnson 빠’를 자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답게 Clapton은 비교적 덜 알려진 Johnson의 곡을 하나 더 부르는데 바로 「Malted Milk」이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다시 한 번 Walter Hill의 <Crossroads>를 보고 싶게 만드는 치명적인 매력이 이 곡에는 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Robert Johnson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진귀한 경험을 어쩌면 클랩튼과 우리 모두는 한 것일지 모른다.
세대가 세대여서 Yardbirds를 실시간으로 경험했을 리 없는 나에게 Eric Clapton이라는 뮤지션, 나아가 ‘블루스 키드’ Eric Clapton의 진면목을 알게 해준 첫 앨범이라면 단연 이 작품이었다. 어쩌면 라이브였기에 더 생생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이 공연에서 그의 기타, 그의 노래는 Cream과 Blues Breakers, Blind Faith와 Derek and The Dominos, 그리고 그의 다른 솔로 앨범들보다 언제나 더 나를 설레게 한다.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란 이처럼 리스너의 인생에도 적용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