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믿고 듣는 밴드가 한 팀쯤은 있을 거다. 음악마저 소음으로 느껴질 때,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 자체가 지치거나 질릴 때 그래도 찾게 되는 그런 오랜 친구 같은 밴드. 나에겐 스피츠(Spitz)가 그렇다. 스피츠만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가슴 한 켠이 아련해진다. 요즘처럼 시원한 가을 하늘 떠가는 구름 같은 자유로움이 그들의 음악에는 있다. 자유를 좇는 인간의 본능. 그 본능으로 나는 데뷔 25년차 일본의 국민 밴드 스피츠의 음악을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듣는 것이다. 사메나이(醒めない). 깨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피츠의 통산 15집 제목으로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첫 곡’에 쓸 양으로 만들었다는 ‘깨지 않는(醒めない)’이 암시하듯 이번 앨범은 꽤 록킹하다. 이 곡의 주제는 대략 ‘록(밴드)의 정신을 잊지 말자’ 정도가 되겠는데, 자신들이 처음 밴드를 시작했을 때 초심을 노래하고 있다. 그 초심이 바로 이 앨범 근저에 깔린 결정적 정서일 거라 나는 생각한다. 밴드의 41번째 싱글로, 일본 엔티티 동일본 기업(NTT東日本企業)의 광고 음악으로 쓰인 다음 곡 ‘항구(みなと)’는 물론 첫 곡과 전혀 다른 감성으로 한 없는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코구마! 코구마!(子グマ! 子グマ!)’부터는 다시 밴드의 로큰롤을 향한 애정 또는 집념을 읽어낼 수 있다. 스피츠풍 멜로디가 작렬하는 ‘혜성(コメット)’과 ‘SJ’, 앨범 재킷 속 상상의 동물을 노래한 ‘모냐모냐(モニャモニャ)’ 정도를 빼면 이 앨범은 되도록 활기차고 웬만하면 신난다. 귀여운 기타 리프가 적당히 가벼운 리듬에 실려 가는 ‘가여운 녀석(ナサケモノ)’은 아마도 그 중간이리라.
앨범의 모든 곡은 언제나처럼 보컬과 리듬 기타를 맡는 쿠사네 마사무네(草野正宗)의 몫. 때문에 그의 음악 취향은 곧 스피츠의 음악 성향이기도 하다. 알려진 바대로라면 쿠사네의 음악 유전자에는 칩 트릭(Cheap Trick)의 파워 팝과 댐드(The Damned)의 펑크, 라이드(Ride)의 슈게이즈, 데이빗 보위의 글램록, 그리고 한때 송라이터 쿠사네 마사무네에게 음악을 접어야겠다는 좌절을 안긴 블루 하츠(The Blue Hearts) 출신 기타리스트 마시마 마사토시(真島昌利)가 두루 섞여 있다. 이번 새 앨범은 이 화려한 레퍼런스들을 쿠사네가 어떤 식으로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면 맞겠다. ‘에스카르고(エスカルゴ)’의 어여쁜 헤비니스는 비록 없어도 ‘로빈슨(ロビンソン)’의 극한 낭만은 간간이 찾아낼 수 있다. 알 듯 모를 듯 마사무네의 가사 속 신비감, 미성과 허스키의 중간에 선 마사무네의 동화 같은 보이스 역시 모든 곡들에 걸쳐 진하게 스며있으니 팬들은 기대해도 좋다. 그냥 이 모든 것이 결성 이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멤버 라인업 마냥 그 자리에 있다. 그저 책상다리에서 다리 하나 쭉 뻗은 느낌이랄까. 그런 자세만 바꾼 여전함이 스피츠의 열 다섯 번째 앨범에는 있다.
1997년 이후 일본 문화가 많이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제이팝(J-Pop)은 영미팝의 인지도에 뒤진다. 라디오에서 들을 수 없고 그 흔한 스트리밍으로도 정말 유명한 몇몇 뮤지션, 밴드, 음반들만 겨우 들을 수 있다. 21세기에도 제이팝은 마니아들을 제외한 한국인들에겐 여전히 ‘가깝고도 먼’ 음악이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선 많이 나아졌으니 스피츠의 음악이 그 경계 아닌 경계를 좀 더 허물어주길 기대해본다. 그런 뜻에서 ‘항구(みなと)’를 한 번 더 듣는다. 그것이 영화든 만화든 음악이든 내가 일본 문화를 찾는 이유가 이 한 곡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