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고 아름다운 슬픔의 결정체
이상의 날개. 우리가 아는 작가 ‘이상’과 우리가 꿈꾸는 관념의 ‘이상’을 중의로 묶은 것에 날개가 돋아 지어진 이름이다. <날개>는 물론 그 유명한 이상의 대표작 제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굳이 작가 이상의 작품과 이들 음악을 연관짓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오월’), 마르크스와 멜서스를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독으로 삼킨 듯 세상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망각’)이 곡들로 그려진 바 없지 않지만 그건 너무 뻔한 분석이고 또 그만큼 작위적인 해법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나는 더 이상 이름의 상관 관계를 놓고 왈가왈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둘의 관계를 소설 속 한 문단으로만 엮어두고 그것을 선언 삼아 이 리뷰를 계속 써나가려 한다. 텅 빈, 그러나 가득찬 노자식 “의식의 흐름”이 밴드 이름과 작품 이름 사이에서 이미 이뤄지고 있듯 이 문단 역시 한 발 앞서 이 앨범의 가늠자 역할을 해내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처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 이상 <날개>에서
포스트록이라는 장르는 깊이 보단 자극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재즈 만큼 버거운 음악 장르이다. 말 많은 가사 보단 묵언의 연주에 치중해 지루하기론 프로그레시브록 만큼 악명 높고, 오로라 같은 디스토션(distortion) 쓰나미 덕분에 시끄럽기로는 헤비메탈 못지 않은 반감을 사온 장르. 그래서 포스트록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오해의 장르이다. 그리고 집중의 장르이다. 이 음악은 집중해서 들어야 비로소 본질에 닿을 수 있으므로 포스트록은 어쩌면 인내의 장르일지도 모른다. 또한 환희와 절망, 분노와 소멸이 함께 있어 이는 차라리 해탈의 장르라 해도 괴이하진 않으리라. 그런 포스트록을 하는 이상의 날개는 듣는 이의 심장이 부서지고 듣던 이의 눈에서 눈물을 뚝 흘리게 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서정과 낭만, 그리고 자유. 이것은 시작부터 자신들이 지향해온 음악 성향이기도 하다.
‘이승열과 시규어 로스가 만났다’ 같은 지리한 레퍼런스 담론 역시 제쳐두고 본론부터 얘기하자. 이들의 음악은 눈물 같은 음악이다. 뼛속까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동시에 이 지구를 찢을 것만 같은 거대한 사운드로 청자를 코너로 몰아세운다. 그렇다고 위압적인 것은 아니고 거기엔 되레 위로가 담겨 있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인간 세상의 기계적 망상을 꾸짖는가 하면, 불꽃처럼 사그러지는 기억의 필름에 가슴 아파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둘지 않고 에둘러 간다. 소리로 공간을 훔쳐 거기에 시간을 박제시키는 기술을 이들은 알고 있다. 모호하지만 모든 걸 감당해내는 트레몰로 기타 멜로디, 우주의 시작이 마치 자신들의 음악에서 비롯된 듯 기타 이펙터의 뜨거운 배신은 그 방법론이다. 이상의 날개는 그림 그리듯 섬세하게 자신들의 내면을 그러면서도 과감하게 꺼내보이는 팀이다. 가라앉다 부풀기를 반복하는 입체 사운드. 있음과 없음의 공존. 반목보다는 어울림. 저항보다는 이치에 그들은 그들의 입장을 놓는다. 그러고보면 이들은 문학적 서두로 철학적 본론을 이끌어내는 음악을 지금 하고 있다. 뜻이 있고 깊이가 있어 더 음악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요즘 같은 ‘상실의 시대’에 이런 팀 이런 음악은 그래서 고맙다. 안아주고 싶은 음악이 나를 안아주고 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우연인가. 이상의 날개를 들으며 내가 느낀 감정의 앙금이 이상의 <날개>에 있었다.
결국 이상의 날개와 이상의 <날개>를 굳이 결부짓지 않으려 한 내 의도는 이처럼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