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주의자'의 음악적 홀로서기
이채언루트는 워밍업에 불과했다. 이처럼 강렬하고 현란한 음의 이빨들을 감춘 채 그는 대체 얼마를 더 버티려 한 것일까. 마크 오 코너(Mark O’Connor) 같은 세계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온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이젠 스스로가 홀로 우뚝 선 싱어송라이터(프로듀싱과 어레인징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인 강이채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은 한 철학자의 말처럼 “불안과 슬픔의 형이상학적 머뭇거림”에 가까운 소리 뭉치이다. 그 안에선 클래식과 재즈에서 트립합, 신스팝에 이르기까지 무한대 장르 놀음이 신명나는 한 판을 벌인다. 적지 않은 13트랙 풀렝스 앨범임에도 마지막 ‘안녕(my sweet lunatic)’이 끝날 때 진한 아쉬움이 남는 건 그런 음악적 다양성 때문이다.
오페라의 서곡(overture) 마냥 짧고 웅장한 배경음을 깔고 자신과 바이올린의 만남을 나레이션으로 풀어낸 ‘the violin’을 지나면 스스로도 사운드 디자인에 가장 공을 들였다는 타이틀 트랙 ‘radical paradise’가 흐른다. 일렉트로닉과 클래시컬 뮤직이 절박하게 뒤섞이는 사이 무심한 강이채의 목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섬세하게 지워진 목소리의 부재는 금새 80년대 신스팝 사운드로 대체되는데 세 번째 트랙 ‘L.A.’다. 현대적이고 아련한 느낌을 주는 낭만의 과거 여행. 여기까지가 이 앨범의 1부라면 맞을 것이다. 이어지는 ‘성냥’은 그 주법과 장르를 감안할 때 분명 이채언루트의 연장일 것인데 이 곡은 나중에 ‘maybe I did’라는 영어 버전으로 한 번 더 만나게 된다.
세상 모든 연인들이 마주하게 마련인 만남과 헤어짐의 복잡한 감정을 터미널이라는 공간에 투영한 ‘terminal’은 과감한 전자음 소스와 김필의 애절한 보컬을 앞세워 반복해오던 기나긴 코러스와 맞선다. 그리고 이어지는 ‘something cold’는 바이올린과 타악에 몰입한, 하지만 베이스는 배제한 이채언루트의 흔적을 한 번 더 이 작품에 새겨낸다. 강이채는 여기서 ‘노래하는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풀어헤친다. 이어 문제의 트랙 ‘now I see’가 나온다. 장르가 장르를 만나 장르를 깨부수는 이른바 ‘크로스오버’의 정수를 들려주는 이 곡은 마치 바네사 메이와 잉베이 맘스틴이 한 몸이 된 듯 빠르게 치고 나가는 후반부 반전이 좋다. 이 후련한 네오 클래시컬 기타 속주는 버클리 음대 시절 강이채와 연을 맺었을 기타리스트 마티아스 민퀫(Mathias Minquet)의 솜씨로, 그는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와 함께 ‘gyp’, 그리고 이 곡에 범접하기 힘든 풍만한 자유를 안겨주었다. 여기까지가 이 앨범의 2부이다.
마지막 3부의 시작. 뭔가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드는 소품 트랙 ‘when memories are the poison’을 지나면 마치 가야금 뜯듯 들리는 ‘will the moon’과 ‘maybe I did’가 내리 흐른다. ‘maybe I did’는 앞서 말했듯 ‘성냥’의 다른 버전으로 자칫 성길 뻔한 빈틈을 메우는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연주가 귀를 잡아 끈다. 힘든 일을 겪는 이들에게 보낸다는 ‘everything will be alright’ 역시 앞선 두 곡과 같이 영리한 피치카토 주법으로 마감해 행여 연주곡이 가질 법한 지루함을 사전에 차단해내었다. 황홀해하는 재킷 속 강이채를 음악으로 표현한 듯한 사차원 다운템포 넘버 ‘안녕(my sweet lunatic)’은 그의 설명처럼 가장 뒤엣곡이지만 가장 처음 만든 것으로, 이 앨범을 끝까지 들어준 사람들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라 본인은 전하고 있다.
2016년도 두 달 여 밖에 남지 않은 지금 그래도 국내 신보들에 관심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앨범 때문이다. 9와 숫자들, 이소라, 마하트마. 신보들은 각자의 카테고리 안에서 아직 더 대기 중이다. 모두 강이채의 이 앨범처럼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될 타이틀들이다. 급진주의자(들)의 천국. 그러고보면 앨범 타이틀 한 번 멋지게 잘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