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인터뷰나 촬영도 겉으로는 멋들어져 보이나, 페이가 없다. 차비도 없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것은 정말 문제이다. 나는 잡지에 개 잘나온 사진들만 남기고 굶어서 죽을 수도 있다.” - 2017년 2월27일 이랑의 트위터에서
우리는 돈을 부정하면 삶이 부정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나와 당신의 주의가 아닐 순 있지만 세상은 그 주의 아래에서 그 주의를 배회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바꿀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어쩌면 인간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현실일지 모른다.
어제 본 <재심>이라는 영화에서 정우와 이동휘의 대화는 내가 암묵 동의한 자본주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약속인지 새삼 실감케 해주었다. 둘은 ‘살인자라는 누명을 벗고 사람으로서 떳떳하게 사는 것’과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돈이라는 물질 가치’를 놓고 대립하였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둘 중 어느 한 편을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짓지 않은 죄를 떠안아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사는 일은 당연히 부당했지만 남의 죄를 자신이 지었다 인정하고 생계를 보장받는 일을 무조건 부당하다고는 말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강하늘이 쓴 누명은 부당했지만 이동휘가 강하늘에게 건네려 한 돈의 논리는 정당했다는 얘기다. 돈이 없이는 삶도 없으므로 이성이 내린 바른 결론도 돈 앞에선 틀린 결론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세상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굴러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난 2월28일 저녁 7시. 서울시 구로아트밸리에서 열네 번째 한국대중음악상(이하 '한대음') 시상식이 열렸다. 그리고 이날 ‘신의 놀이’로 최우수 포크 노래 상을 받은 이랑은 조금 색다른 수상 퍼포먼스를 펼쳐 시상식이 끝나고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는 지난 1, 2월 자신이 벌어들인 수입을 모두 공개하고 “돈과 재미와 명예가 없다면(시상식에)가지 말라”던 한 친구의 말을 인용하며 받은 트로피를 즉석에서 50만원(50만원은 이랑의 월세이다)에 경매했다. 곧 한 남성이 그 트로피를 정말 현금 50만원을 주고 가져갔고 이랑은 지인의 말에서 하나가 모자란 “돈과 명예”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이랑의 수상 퍼포먼스 전말이다.
그뒤 이 퍼포먼스는 지지와 비판의 두 목소리 사이에서 뒤채였다. 지지는 생계를 위협받는 아티스트로서 이랑의 소신 있는 발언을 주목했고 비판은 이 상을 준 한대음에 이랑이 범한 무례(?)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헷갈렸다. 이 중 한 쪽 편을 든다면 나머지 한 쪽은 무언가 잘못 되었거나 혹은 잘못 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내가 보기에 두 입장은 똑같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칭찬과 비난의 이분법에 앞서 입장의 차이였다. 예술만 하면서 먹고 살고 싶은데 여러 여건 상 그럴 수 없는 이랑의 입장은 만만치 않은 내외부 사정을 견뎌내며 어렵게 14회까지 이끌어온 한대음 입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재심>의 한 장면 즉, 인간으로서 떳떳하게 사는 일과 인간답게 살기 위한 돈이라는 수단을 똑같이 인정할 때 이랑과 한대음의 입장은 비로소 화해할 수 있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찰리 채플린은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에서 예술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물론 반대도 옳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도 그 예술이 그만한 값어치만 한다면 돈은 따르게 마련이다. 피카소의 말처럼 때문에 예술은 처음부터 비즈니스였을지 모른다. 이랑의 그제 퍼포먼스는 본업이 생업일 수 없는 인디 뮤지션들의 말 못할 속앓이를 표출한 제법 의미 있는 행위였다. 그는 사람 사는 데 있어 기본이 되어야 할 돈과 재미를 얘기했고 한대음이 자신에게 건넨 명예에는 따로 감사할 줄 알았다. 거기에는 충고와 풍자는 있었으되 냉소는 없었다. 부디 이랑의 이 참신한 수상 퍼포먼스가 대중의 한대음에 대한 관심, 궁극적으론 한대음과 한국대중음악 전반의 발전에 작은 도화선이 되었으면 싶다. 서로를 노려볼 일이 아니다. 이랑과 한대음은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