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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Mar 27. 2017

악인(悪人)

이상일, 2011


"엉덩이 아파 죽는줄 알았네"

"영화 주제를 모르겠어" 


하나 같이 지루했던 듯 내뱉고 자리를 뜬다.

그들은 왜 지루했을까? 그들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려했는가?

 

스릴러라는 정의와 악인이라는 제목이 주는 묘한 긴장감. 어쩌면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악인' 츠마부키 사토시(유이치 역)가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이길 바랐을지 모른다. 또는 후카츠 에리(미쓰요 역)와 도피가 경찰과 쫓고 쫓기는 할리우드식 추격전이 되길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이치가 폭우에 섞여 자수하러 가는 장면에서 그런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은 악인이 너무 빨리 자수한다, 였으리라. 당연하다. 그들은 악인이 더 나쁜 짓을 저질러 스릴 넘치는 이야기를 펼쳐나가길 바랐기 때문에. 거기서 미쓰요의 눈물과 유이치의 자수 의지를 꺾는 크락션 소리에 주목한 사람들은 비로소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되레 스릴과 액션, 추리를 기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에 이 영화는 철저하게 찬물을 끼얹는다. 실제로 영화에는 딱히 이렇다 할 스릴도 액션도 없을 뿐더러 추리도 필요없다. 범인은 허무할 정도로 상식선상에 있고 범인의 고백은 그대로 진실이다. 액션이래봤자 여자 목조르고 여자 발로 차는게 전부다. 딸을 모욕한 마스오의 대가리를 몽키로 내려치지 못한 요시노 아버지의 삭힌 분노에 지루한 관객들은 분노한다. 왜? 그들은 이미 헐리웃의 정의와 폭력에 익숙해져있으므로, 그런 그들에게 사람의 사랑과 사회의 고독이 제대로 보일리 없다. 그 사람이 행복해하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이라는 뜻이 와닿을 리 없다. 결국 그들은 나쁜(惡) 것만 보려했지 사람(人)은 못본 셈이다.

 

질문도 틀렸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누가 악인인지가 아니다.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1인당 2,366엔을 갹출하는 냉정한 일본식 합리(또는 개인)주의일수도 있고 고인을 안주 삼아 무용담을 펼쳐대는 철없는 대학생의 값싼 허풍일수도 있다. 힘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할머니 등쳐먹는 돌팔이 약장수일 수도 있고 함께 있지만 외로운 일본인 그 자체일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포스터에 쓰여진대로 유이치가 요시노를 '왜 죽였을까?', 그리고 그런 유이치를 미쓰요는 '왜 사랑했을까?'정도는 물었어야 했다. 이렇게 예상과 다른 걸 보러와서 틀린 질문을 하니 영화가 재미있었을 리가 없다.

 

그나마 그들의 불만 중에 단 하나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역시 원작을 뛰어넘진 못했구나, 일게다. 물론 그건 비난관 다른,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대부분 영화들이 그러했듯 선전했음에도 역부족이었나보다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아쉬움이다. 이미지의 즉흥성은 텍스트의 묘사를 다 담아낼 수 없다.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은 버거운 일.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이고 영화와 소설이 갈라지는 지점이며 영화보다 역사가 훨씬 긴 소설이 여태껏 죽지않은 이유이다.

 

어쨌건 <훌라걸스> 감독은 <악인>을 열심히 만들었고 그는 다음 작품을 더 잘 만들 것이다. 이 영화는 내게 그런 막연한 확신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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