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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May 12. 2017

6장, 4시간, 그리고 장르 불문

지미 스트레인 [찰나]


CD(LP) 여섯 장. 러닝타임 네 시간. 뉴에이지, 트로트, 포크록, 헤비메탈이라는 장르 불문. '살인의 추억' 오프닝 씬에 석양이 깃든 듯한 지미 스트레인의 네 번째 앨범이 뽐내는 스펙이다. 4시간이면 세르조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3시간49분)보다 길고 말러의 교향곡 3번을 세 번 연달아 연주해야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이다. 5년만 신작에 6장이니까 10달에 한 장씩 완성한 셈인데 만든 당사자는 정작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 “음악적 영감과 에너지를 그때그때 저장하고 기록하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낀다고만 전했다.


솔직히 음악 자체로만 본다면 인디 씬을 뒤집거나 지구를 뒤흔들 만한 파격 같은 건 없다. ‘헬조선’으로 요약되는 한국 사회의 어둡고 불안한 면은 메탈리카의 박력과 도어스의 염세를 담은 데뷔작 ‘Emotion Frequency’ 때부터 꾸준히 다뤄온 주제이고, 그 시기 “장장 70분”을 강조하며 데뷔했기에 시간 단위로 끊어야 하는 이번 러닝타임도 사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어쿠스틱 피아노와 기타, 스트링, 그리고 헤비메탈에 어깨를 나란히 한 ‘백수의 과로사’ 같은, 조금은 엉뚱해보이는 트로트 역시도 8년 전 ‘Father of Fathers’ 같은 곡에서 이미 들려준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쟁점은 여섯 장이라는 피지컬 음반의 숫자인데 나는 이것이 지미 스트레인을 넘어 한국 인디의 몸부림, 심지어 발악처럼 느껴졌다. 이래도 안 봐줄 거고 이래도 안 들어볼 거야, 라는.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30년 이상 장인들 손을 거쳐 314개 LP 박스를 내놓는 행위를 과연 단순한 창작자의 만족감에만 기대어 설명할 수 있을까. 자본에 종속되지 않으려 닥치는대로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 앨범을 준비했다는 사실과 “창작의 사전에 '가성비'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멋스런 자기 선언 역시 본작에 담긴 관심 전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앞서 ‘발악’이라고 썼지만 나는 이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뉘앙스로 지미 스트레인의 전략을 폄훼하려던 것이 절대 아니다. 되레 그 발악을 응원해주고 싶었고 그 발악을 세상에 더 알리고 싶었다는 게 진심에 가까울 것이다. 그의 고민과 정성은 분명 되새길 만 하고 한편으론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것은 그의 보컬이다. 마치 엑스 저팬의 팬이 스튜디오에 놀러와 재미삼아 부른 듯 들렸던 데뷔작 때부터 지미 스트레인의 목소리는 알게 모르게 그의 음악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요소처럼 보였다. 바로 그가 고집스럽게 ‘인디 원맨밴드’를 강조하는 뜻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도무지 나는 ‘봄 (Spring)’이라는 곡에서 목을 덜 푼 김장훈 같은 그 힘겨운 고음 처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했다. 악기 연주는 그렇다 쳐도 보컬 파트 만큼은 피처링으로 처리했다면 어땠을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것이다. 이마저도 ‘인디’의 영역이고 정신이라면 더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그의 보컬은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개선과 개혁이 몽상으로 끝나고 마는 현실”을 담았다는 파트6 ‘Screaming’을 끝으로 앨범은 길었던 시간의 문을 닫는다. 아마도 정권이 바뀌기 전 만든 앨범이라 개선과 개혁의 유예를 짚은 듯 한데, 알다시피 이제 우리의 현실은 이 앨범이 묘사한 지옥 같은 곳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출발선에 다시 섰다. 부디 ‘찰나’는 오랜 희망과 행복에서 비롯되리라는 역설이 이 앨범의 운명이라면 좋겠다. 내가 이 앨범에 관심을 가진 건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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