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일본의 라디오헤드’라고 불린다. 그들에겐 분명 영광이자 부담의 수식어일 터다. 슬리피(sleepy.ab). 발음되지 않는 ‘ab’는 추상적이고 애매한 세상을 뜻하는 ‘abstract’와 절대성을 뜻하는 ‘absolute’라는 두 가지 뜻을 가졌다. 보컬과 기타를 맡은 나리야마 츠요시(成山 剛)를 중심으로 야마우치 켄스케(山内憲介, 기타), 타나카 히데유키(田中秀幸, 베이스), 그리고 드러머 츠와 히데키(津波秀樹)까지 4인조였으나 2012년 츠와 히데키가 탈퇴하면서 지금은 3인조로 활동하고 있다. 존 본햄을 잃은 레드 제플린이 그랬듯 츠와의 빈자리는 빈자리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슬리피는 맥주로 유명한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신이다. 넷은 경전음악방송예술전문학교에서 만났는데 처음엔 츠와가 빠진 라인업으로 슬리피의 전신 밴드를 만들었다가(1998년) 4년 뒤 츠와가 가세하며 슬리피가 되었다. 밴드 결성 당시 야마우치는 애시드 재즈, 타나카는 헤비메탈, 츠와는 훵크와 재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슬리피의 그 몽롱하고 비현실적인 브릿팝 사운드는 프론트맨인 나리야마의 취향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 뒤늦게 한국 팬들을 찾아온 앨범 3장(‘palette’,‘fantasia’, ‘archive’)은 지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발표한 이들의 3, 4, 5집으로 포스트록이나 인디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어볼 만 하다. 환상적이고 멜랑콜리한 사운드스케이프, 부드러운 빛으로 충만한 목소리, 공격적 어택이 있는 비트(‘Mass Gimnastic Display’)라는 현지 평가대로 슬리피의 음악에는 나른하고 연기 같은, 그러면서도 강렬한 한 방이 있다. 라디오헤드 같다는 평가는 ‘white’나 ‘inside’ 같은 곡이 정말로 ‘OK Computer’ 시절 라디오헤드를 떠올리게 하면서 그 나름 설득력을 가진다.
비록 발매 당시엔 오리콘 차트 100위권, 최악은 200위권까지 밀렸던 앨범들이지만 이 작품들 이후 슬리피의 인지도가 수직 상승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부분이다. 2009년작 ‘paratroop’가 차트 64위, 2011년작 ‘Mother Goose’는 차트 52위에 각각 올랐다. 너무 유명한 레퍼런스를 곁들여 소개되는 것이 이 밴드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슬리피에게 라디오헤드는 한계이자 극복의 존재라는 것이다. 베끼기에만 급급한 음악이었다면 굳이 지난 앨범들을 지금 사람들에게 내놓았을 리가 없다. 그들은 라디오헤드를 좇으면서 라디오헤드를 버린다. 슬리피의 개성은 바로 그 모순의 자기단련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