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 록 음악을 열심히 들은 사람이라면 시애틀 사운드(Seattle Sound)를 모를 리 없을 게다. 그런지(Grunge)로도 알려진 이 경향은 유행을 이끈 밴드들이 미국 워싱턴 주 항구도시 시애틀 출신이거나 그 근처 출신이어서 붙은 이름인데 너바나와 펄잼, 사운드가든과 앨리스 인 체인스는 당시 4인방으로서 맹위를 떨친 바 있다. 음악 스타일이 그런지에 가까운 스톤 템플 파일럿츠도 이 부류에 끼워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들은 캘리포니아 출신이므로 통상 그런지 하면 위 네 밴드를 정석으로 친다.
이른바 시애틀 4인방의 공통점이 무엇이었던가를 곰곰 생각해보면 네 밴드 모두 출중한 보컬리스트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프론트맨들은 모두 싱어송라이터로서도 남다른 감각을 지녔었다. 폭탄 같은 성대를 가진 커트 코베인은 펑크와 노이즈 사운드를 기반으로 너바나의 핵으로 군림했고 염세의 낙원을 향했던 레인 스텔리는 기타리스트 제리 캔트렐과 자웅을 겨루기에 하등 부족함 없는 실력을 뽐냈다. 4옥타브를 넘나들었던 사운드가든의 크리스 코넬은 모던하고 사이키델릭한 블랙 사바스 같은 음악으로 씬을 장악했으며, ‘Better Man’이라는 곡으로 팀을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정상으로 끌어올린 에디 베더 역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목소리로 여태껏 1인자의 지위를 누려왔다. 이중 현재까지 생존자는 두 사람이었다. 커트와 레인은 각각 94년, 2002년에 자살과 약물로 생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얄궂게도 둘이 사망한 날짜가 4월5일로 같다. 그리고 또 한 명. 사운드가든의 크리스 코넬이 현지 시각으로 2017년 5월17일 디트로이트 폭스 씨어터(Fox Theater)에서 사운드가든과 마지막 공연 후 자신의 호텔방에서 목을 메 숨진 채 발견되고 만다. 커트와 레인 보다는 비교적 오래 살았지만 그 역시 죽기엔 너무 이른 향년 52세였다.
현 펄잼 멤버들과 뭉쳐 단 한 장 앨범을 남긴 템플 오브 더 독(Temple of the Dog), 기타리스트 킴 테일, 베이시스트 히로 야마모토, 드러머 맷 카메론과 일군 90년대 최고의 밴드 사운드가든,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의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와 의기투합한 오디오슬레이브, 그리고 일련의 솔로 앨범과 각종 OST 등 번외 활동까지. 10대 때 비틀즈에 흠뻑 빠져 지낸 싱어송라이터 크리스 코넬은 진부하지 않은 코드 진행과 어긋난 리듬으로 듣기 좋은 멜로디를 뽑아낼 줄 알았던 천생 작곡가였고, 바리톤과 테너 사이에서 감정 표현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전천후 보컬리스트였다.
그가 해온 음악 성향이나 활동 반경이 그러한지라 자칫 크리스를 록 보컬리스트라는 테두리 안에 가둘 위험이 있는데 사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블루스와 알앤비/소울까지 소화할 수 있는 기교파로, 생전에 마이클 잭슨과 휘트니 휴스턴의 곡을 부른 것과 함께 조니 캐쉬가 커버 한 ‘Rusty Cage’의 하드한 질주 이면에 꿈틀대던 ‘Black Hole Sun’의 풍운아 기질은 그래서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여기에 영화 ‘노예 12년’ OST에 실린 조이 윌리암스와 듀엣곡 ‘Misery Chain’이나 미국 드라마 ‘바이닐 : 응답하라 락앤롤’에 삽입된 ‘Stay With Me Baby’, 오디오슬레이브 시절 ‘Like a Stone’, ‘Be Yourself’ 같은 히트곡들, 그리고 그의 솔로 앨범 ‘Euphoria Mourning’까지 들어보면 그가 왜 롤링스톤 선정 ‘역대 최고 리드 싱어’에서 9위에 올랐고 기타월드 지 독자 선정 '가장 위대한 록 보컬'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화가 나 있거나 고독과 절망에 찌든 곡도 크리스 코넬의 목소리를 거치면 그 안에 낭만과 위로가 스며든다.
크리스 코넬은 글쓴이에게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의 기준, 개념 폭을 넓혀준 사람이었다. 고음 처리에 능하고 발성과 기교가 발군이면 좋은 보컬리스트라는 얕은 생각에 제동을 걸어준 것이다. 거칠고 자유로우면서도 섬세한 본능의 끈을 놓치 않는 그의 보컬 세계에서 노래를 듣는 새로운 방법을 배웠다. 다시 오디오슬레이브 활동에 들어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사운드가든도 오디오슬레이브도 마이크 주인을 잃고 역사에 박제될 일만 남았다. 또 하나의 재능이 이렇게 묻히고 만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마침 오디오에선 ‘Blow Up The Outside World’가 흐른다. 학창시절 무척 좋아했던 곡이다. RIP Chris Corn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