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Pia, 양혜승
“똑같은 비트라도 그의 손에 스틱이 쥐어지면 수 백, 수 천 가지 베리에이션으로 다양해지고, 현란한 박자 쪼개기에 힘이 잔뜩 실린 정확한 터치까지 더해져 그의 드럼 스펙트럼은 그 끝도 모르게 다양해진다. 아마도 그런 것을 미리 캐치한 서태지도 완벽을 추구하는 자신의 앨범 작업에 그를 꾸준히 참여시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최재혁 (전 델리 스파이스/옐로우 몬스터즈, 현 잠비나이 드러머)
<대중음악 SOUND Vol.3 : 한국대중음악 100년>에서 인용
그의 드러밍은 시작부터 싹수가 보였다. 몸 담고 있는 밴드의 시작은 콘(Korn)이나 데프톤스였지만 쓰리일레븐(311)의 채드 섹스톤과 노 다웃(No Doubt)의 애드리안 영을 좋아하는 그는 직선적이고 헤비했던 친정 밴드 음악에 곡선을 주고 여유를 칠했다. 결국 그 드러밍은 2집 [3rd Phase]를 시작으로 3집 [Become Clear]를 기점 삼아 밴드 음악의 중심이 되었고 그의 존재는 급기야 밴드 전체를 대표하게 되었다. 바로 피아(PIA)의 드러머 양혜승(이하 혜승)이다.
혜승은 리듬을 썰며 그 리듬 위에 올라 타는 몸짓을 한다. 흥에 젖은 거북목의 앞뒤 반복, 팔다리는 힘과 타이밍 사이에서 초조하게 잠들어 있다. 그는 자신의 비트로 춤을 추며 드럼을 친다. 연하고 야한 스틱킹, 스틱킹과 킥킹으로 쪼개나가는 리듬의 굵직한 변덕은 어느덧 요한의 스크리밍보다 더 짜릿한 절규의 덫을 피아 음악에 놓았다.
그는 확실한 드러밍을 즐긴다. 어수선하거나 애매한 비트는 혜승의 계산 밖에 있다. ‘소용돌이’에서 인상적인 악센트, 하이햇으로 리듬을 꺾은 ‘융단’ 같은 곡엔 유니크한 폴리리듬을 배치하며 그는 자신의 리듬 세계를 통제했다. 그것은 바짝 약이 올라있는 스네어 드럼 톤과 영리한 서스테인을 거름 삼아 확보, 적용되었고 듣는 사람들이 대번에 호의를 갖게끔 이후 여러 곡들에서 필사적으로 증명되었다.
나는 혜승의 드러밍이 꽃 피운 지점을 피아 3집 [Become Clear]라고 보는 쪽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개념은 바로 ‘즉흥성’. 그는 한 인터뷰에서 3집 녹음 당시 열흘 잡았던 드럼 녹음 스케줄을 여드레 줄인 이틀 만에 끝냈다고 했다. 보컬 라인에 필인이 많이 없어 드럼 필인을 즉흥적으로 많이 써야 했다는 혜승. 이 말은 매우 중요한데, 즉흥적 필인은 사실상 드러머 혜승의 필살기, 아니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즉흥에 강하고 즉흥을 즐기는 혜승의 습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고스트 노트(Ghost Note). 있는 듯 없는 듯 한 그 느낌이 ‘귀신 같다’ 해서 붙여진 이 비트명은 이후 혜승이라는 드러머를 얘기하거나 소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된다. 3집의 '처음의 속삭임'과 4집의 ‘galaxy’, 그리고 2008년작 EP [Urban Explorer]의 ‘misconstrued’와 ‘silver’에서 들려준 이 섬세한 리듬 깎기 기술은 서태지가 리듬의 귀재였던 헤프 “더 머신” 홀터 자리에 혜승을 앉힌 결정적 이유이기도 했다.
2008년 가을. 서태지 8집 대표곡 ‘moai’를 연주한 혜승의 모습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었다. 당시 서태지에게 합법적, 자발적 ‘사육’을 당하고 있다 알려졌던 그는 1.5평 남짓 공간에서 치밀하고 날카로운 고스트 노트를 전개, 서태지 팬들과 피아 팬들을 동시에 열광시켰다. 그 뒤 ‘juliet’과 ‘coma’까지 이어진 이 난폭한 스틱의 진저리는 이언 페이스(Ian Paice)가 ‘burn’에서 제시한 것을 계승한 듯 들렸던 ‘human dream’ 등과 함께 서태지의 5년 만 출사표에 확신으로 자리매김 했다.
혜승은 록 드러머이지만 그는 펑키 리듬을 즐긴다. 헤비했던 피아 2집에서조차 그는 펑크(funk)를 자신의 본질로 삼았다. 피아 3집에서 그 본질은 본격화되었고 여태껏 혜승의 스타일로 확고하게 이어져왔다. 하지만 곡을 중심으로 짜인 동선과 힘을 중시하는 록 밴드 드러머 자리에서 그는 언뜻 동떨어져 보일 때도 많다. 그는 피아에 속해 있을지언정 그의 드러밍은 피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루브는 번뜩이고 플레이는 자유롭다. 때론 치밀한 완벽주의가 그의 드러밍에서 고독마저 내뿜게 한다. 무표정하고 앳된 얼굴. 그러나 헐크 같은 비트가 용솟음 칠 때 그는 냉혹한 리듬 킬러로 단숨에 변한다. 혜승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