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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ug 10. 2017

가해자와 피해자

<포크레인>과 <택시운전사>를 보고


불과 2주 사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이하 '5.18')을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았다. 한 편은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였고 다른 한 편은 이주형 감독의 <포크레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김기덕 감독과 인연이 있어 일단 흥미로웠다. 장훈 감독은 김기덕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다 김기덕이 각본을 쓴 <영화는 영화다>로 감독 데뷔를 했고, 이주형 감독은 <붉은가족>에 이어 한 번 더 김기덕의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해독해내었다. 두 감독들의 전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번 두 작품이 얼마나 다른 온도를 지닐 것인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을 터. 예상은 역시 빗나가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포크레인>이 더 좋았다. 그것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이야기이기 전에 우선  5.18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이 마음에 들었고, 결정적으로 "그날, 왜 그곳에 우리를 보냈냐"는 질문에 나는 무릎을 쳤다. 적어도 5.18 정도의 역사를 다루는 영화라면 나는 영화 같은 영화 보단 의미 있는 영화, 영웅 만들기 보다는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한 노력이 담긴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장선우의 <꽃잎>, 이창동의 <박하사탕>,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 심지어 김지훈의 <화려한 휴가>를 볼 때도 그랬다. 영화의 플롯을 위해 소비되는 팩트를 넘어 사건의 본질을 묻기 위해 도입되는 영화적 장치를 나는 더 원했다. 떠올려보면 조근현의 <26년>이 작품성을 떠나 그런 내 바람에 그나마 가까웠던 영화였지 않나 싶다. <26년> 역시 산발적인 가해자들이 아니라 구체적인 최초 명령자를 비난하고 응징해야 할 타겟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만 <포크레인>과 차이라면 심판 또는 죽음의 그림자가 승복 아래 군복을 받쳐 입은 전 진압군 부대 사단장의 관자놀이 대신 '그 인간'의 대머리에 드리운 정도였을 것이다. 두 영화가 가진 냄새는 거의 같았다.


그런 면에서 <택시운전사>는 재미는 있는 영화였을지언정 흥미는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목격자로서 해외 기자와 국내 택시 기사, 그 사이 피어나는 둘의 우정이라는 주변 소재는 5.18이라는 핵심 소재를 압도해버렸다. 김기덕의 시나리오로도 상업적 성공을 일구어낸 장훈의 작품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으리라. 반면 <포크레인>은 시점부터 가해자라는, 기존 5.18을 다룬 작품들관 시작에서 반대에 서 있다. 시민 학살 때 쓴 탱크의 무한궤도와 대한민국 현대사의 상처가 녹아있는 녹슨 포크레인. 이주형 감독은 그것으로 파묻힌 진실을 퍼내려 다시 한 번 김기덕 감독과 손 잡고 재차 달콤한 상업적 성공을 돌 보듯 했다.  


연기도 <포크레인> 쪽이 더 훌륭했다. 아니, 이 또한 더 좋았다고 하자. 어차피 그런 판단은 각자가 다르게 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송강호가 명배우라는 전제, 그 전제가 참이라는 상식이 아닌 엄태웅이라는 탁월한 배우가 있었다는 관객으로서 기억 점검에 더 가까운 결론이다. 엄태웅은 이 영화에서 넘치지 않으면서 격한, 그러면서도 차분하고 슬픈 연기를 기적처럼 해내며 기어이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그에게 <포크레인>은 인생작이 될 지도 모른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토마스 크레치만과 유해진, 류준열과 박혁권의 숏들보다 김경익, 정세형, 조덕제, 조영진, 박세준, 조원희, 신창수, 손병호가 장악한 신들에 더 빠져들었다. 엄태웅의 방문과 질문에 다르게 대응하는 그들 각자 연기색은 마치 <해안선>과 <사마리아>의 긴장에까지 뻗은 듯 광기어렸다. 직접 연출은 하지 않았으되 아마 김기덕도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화와 판타지. 영화 끝에 영화의 실제 인물(2016년 1월에 세상을 뜬 위르겐 힌츠페터)을 등장시킨 <택시운전사>와 달리 무한궤도로 전국을 다닌다는 설정의 <포크레인>은 판타지다. 하지만 별개처럼 보이는 실화와 판타지는 흡사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마냥 같은 역사를 붙들고 서로의 이야기를 한다. 한쪽은 피해 정황과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반대쪽은 가해하며 목격 당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한 작품을 향한 나의 편애는 바로 여기에서 불거졌다. 익숙한 헐리우드식 영웅 캐릭터인 택시운전사 김만섭보다 나는 비교적 덜 익숙한 독수리부대 3대대 2중대 3소대 병장 김강일에 더 끌린 거다. 5.18의 가해자 집단 소속인 그는 어느날 '누가, 왜 우리를 그곳으로 보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렸고 답을 얻기 위해 먼 길도 마다 않는다. 이 분노에 찬 적극성이 나는 좋았다. 아니 어쩌면 5.18이라는 쓰라린 기억 앞에서 던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마침내 영화의 주제로 다뤄지는 걸 보며 나는 아주 약간 설렜는지도 모른다. 과연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상식상 폭력 진압의 최초 명령자라 모두가 알고있는 그 파렴치한이 영화 끝에 등장해 영화에서만이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칠 것인가. 나는 스릴러나 액션 영화와 다른 차원에서 손에 땀을 쥐었다.


나는 누구의 명령이 아니라 내가 판단해서 결정한 것이다.

심각한 국가 체제의 훼손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고,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을 선택했고 후회하지 않는다.

역사라는 거대한 배의 스크루에 물고기 몇 마리가 죽은 것에 연연한다면 그것은 장군의 태도가 아니다.

나는 이 순간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파도를 헤치고 나가야 한다.

훗날 역사가 나를 어디에 놓더라도 나는 당당히 말할 것이다.

나는 국가를 위해 정의를 선택한 것이라고.


- 극중 과거 독수리부대 대대장이 쓴 책 <피의 정의>를 김강일이 낭독한 부분. 아마도 <택시운전사>에서 시민을 향한 진압군의 발포 장면이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며 무려 '법적 대응'을 할 수도 있다 망언 한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을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택시운전사>보다 <포크레인>에 더 몰입하고 공감한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 앞에서 냉정했기 때문이다. 가해자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피해자일 수 있다는 차이 속 균형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존 5.18 관련 영화들과 다른 출발이었기 때문에 나는 <포크레인>을 더 높이 친다. <택시운전사>는 이 세 가지 모두에서 <포크레인>에 대적하지 못했을뿐더러 제대로 된 대척점이지도 못했다. 나에게 <택시운전사>는 그저 <화려한 휴가>보다 조금 더 잘 만들었고 재미있었던 상업적 5.18 영화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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