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사랑한 거장
죽음 근처에 이르러본 사람은 삶에 초연해지게 마련이다. 더불어 삶을 위협하는 것들을 경계하고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들을 가까이 하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사카모토 류이치: 코다(이하 ‘코다’)’는 일본의 세계적인 음악가인 사카모토 류이치가 2014년 인두암 진단을 받은 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은 2011년 3월11일 일본 대지진 때 후쿠시마 현을 덮친 시커먼 쓰나미에 살아남은 피아노 한 대를 마주한 사카모토에 할애된다. 이른바 ‘쓰나미 피아노’다. 이 이름은 그 피아노와 사카모토가 즉석에서 연주한 곡 제목에 똑같이 헌정되었다. 연주를 끝낸 사카모토는 “죽은 피아노 송장을 더듬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코다’는 이렇듯 죽음으로 시작해 자연을 향해 가는 인간 사카모토 류이치를 추적한다.
자연을 지향하겠다는 의지는 인위적인 것들의 오류와 폐해에 반대하겠다는 의지와 같은 말이다. 그는 92년부터 가져온 정치, 사회에 대한 관심을 99년작 전위 오페라 ‘라이프(Life)’를 통해 음악적으로 표현했다. 2년 뒤 9.11 테러를 직접 목격한 뒤엔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이긴다(Only Love Can Conquer Hate)’는 앰비언트 곡을 썼고 이때부터 앰비언트와 전위는 사카모토 류이치 음악의 근원이 된다.
감독 스티븐 쉬블은 자연에 천착해있는 사카모토의 현재와 더불어 그의 과거도 슬쩍 엿보게 해준다. 크라프트베르크와 조지오 모로더를 응용한 일렉트로닉 신스팝 밴드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ellow Magic Orchestra) 시절을 비롯해 영화음악 감독으로서 시발점이 돼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 사카모토를 세계적 거장으로 이끌어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 등 근래 영화 팬들에겐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나 ‘남한산성’의 음악감독으로 유명할 그가 지난 30여 년간 무슨 일을 해왔고 또 세계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스티븐은 조용히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자연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친환경’이다. 음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본 사카모토 류이치는 자유와 자연을 사랑하는 친환경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가령 인간이 완벽하다고 여기는 피아노 조율은 자연이 볼 때엔 엉터리에 불과하다는 사카모토의 깨달음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연의 소리를 찾아나선다. 원하는 빗소리를 담으려 버킷을 머리에 뒤집어쓰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맑은 물소리를 얻기 위해 북극행도 서슴지 않는다. 또 심벌을 향해선 스틱이 아닌 활(Bow)을 갖다대며 자신이 좋아한 쇤베르크나 백남준의 전위를 이어나갔다. 어린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포스트모던과 사회주의는 결국 자연과 앰비언트의 새하얀 침묵 앞에선 덧없는 인위적 산물들일 뿐이었다. 그의 자서전 제목이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음악을 통해 자연이라는 자유를 마주했다.
바흐에서 자극을 얻고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음악가'로서 우러르며 자신만의 부끄럽지 않은 그 무엇을 더 남기고 싶다는 사카모토 류이치. 영화 '코다'는 그의 2004년작 ‘Chasm’과 2017년작 ‘Async’ 사이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친다. 인간이 만든 음악과 자연이 내뿜는 소리의 경중 또는 관계, 삶과 죽음의 거리, 전쟁과 평화의 긴장. 이 모든 질문은 원전 사고가 일어난 후쿠시마에서 살아남은 ‘쓰나미 피아노’로부터 시작된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의 오후를 얼마나 더 기억하게 될까?
어떤 오후는 당신의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네다섯 번은 더 될 지도 모른다.
그보다 적을 수도 있겠지.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어쩌면 스무 번
모든 게 무한한 듯 보일지라도
영화 <마지막 사랑> 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90년작 <마지막 사랑>에서 사카모토가 가장 좋아한다는 라스트씬에 인용된 폴 볼스(Paul Bowles)의 문장을 그는 다른 언어들과 소리로 콜라주하고싶어 했다. 그리고 감독은 이 작품이 새로운 음악의 탄생으로 끝이 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제목을 코다(coda, 음악의 종결부)로 지었다고 했다. 무한한 듯 보여도 끝이 있는 삶, 새로운 음악의 탄생과 함께 끝이 나는 영화. 제법 잘 어울리는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