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분위기의 예술이다. 사람의 말과 행위 사이에서 음악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사람은 그 음악에 따라 말과 행위를 달리 한다. 가령 <공동경비구역 JSA>의 하이라이트에서 김광석의 모던 포크가 끝나고 거친 하드록이 그 자릴 대신 했을 때, 북한 초소에서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우린 이미 알고 있다. 평화와 전쟁 사이에 음악 하나가 끼어들었을 뿐인데, 음악은 기어코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 했다. 기억은 이미지이지만 이미지는 분위기 아래에 있다. 영화(이미지)는 기억을 지배하지만 그 영화를 지배하는 건 바로 음악(분위기)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장편 <곡성>을 보았다. 개봉 뒤 수많은 해석들이 인터넷을 달구었고, 해답 없는 해석들은 저마다 논리를 간직한 채 담론이란 걸 형성했다. 영화에 숨겨진 의미들, 감독이 숨겨놓은 장치들, 아역 배우의 미친 연기, 정서적인 것들과 물리적인 것들 사이의 괴리, 공포. 그것이 낳은 기괴함. 의심과 의미가 영화 한 편을 두고 끝없이 번져나갔다. 하지만 거기에 음악 이야기는 없었다. <곡성>을 지배했던 건 음악이었는데 정작 이 거대한 담론 안에서 음악은 소외되었다. 곡성(哭聲)에서 곡성(曲性)이 빠진 것이다.
각각 장선우의 <거짓말>(1999)과 김지운의 <반칙왕>(2000)으로 음악감독 데뷔를 치른 달파란과 장영규. 둘은 대한민국 인디뮤직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밴드(삐삐밴드, 어어부프로젝트)에서 활약했고 또, 지금도 활약 중인 뮤지션들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고지전>(2011), <도둑들>(2012)에서 호흡을 맞춘 둘은 <곡성>에서 다시 한 번 음악과 영화를 바라보는 서로의 비슷한 성향을 공유했다. 물론 그 결과는 대성공이다.
다시, 음악은 분위기의 예술이고, 영화(이미지)는 분위기에 지배받는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곡성>에서 음악은 매우 중요하다. 중요하다 못해 절대적이다. 이것은 ‘shape of my heart’를 듣고 <레옹>을 떠올리는 수준의 찬양이 아니다. 감정선이 거의 전부인 영화 <곡성>에서 두 음악감독의 활약은 나홍진의 각본과 연출을 숨 쉬게 한 일등공신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치한 소리를 ‘음악’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운드디자인’이라고 부른다. 잘 짜인 음계 보다, 불협화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기괴하고 섬뜩한 톤”을 내려 했다는 데서 그들은 탁월한 '사운드디자이너'들이다. 감정의 과정과 암시를 위해 예리한 현악기를 썼고, 일광(황정민)의 등장마다에 공격적인 타악기를 심어두어 그가 얼마만큼 ‘세고 잔인한 놈’인지 알게 했다. 따지고 보면 비슷한 계열의 고전인 히치콕의 <싸이코>(1960)를 달파란이 언급하고, 해외 평단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을 이 영화와 연관지은 것도 다 그 잔인한 사운드디자인 때문이었다. 두 작품 모두 소리가 영상을 이끌고, 사운드가 스크린을 지배한 위대한 사례들이다.
나홍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곡성>의 음악이 관객들을 위한 ‘안내’ 같은 것이라고 했다. 즉, <곡성>에서 음악은, 등장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정확하게 짚어주기 위한 장치로서 음악이라고 그는 고백하였다. 개봉 뒤 <곡성>을 보고 밤잠을 설친다는 사람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두 번, 세 번 더 보는 분들이 많다 들었다. 그 중 단 한 번만이라도 음악(소리)을 중심으로 이 영화를 따라가 보길 권한다. 오컬트와 좀비로 드리웠던 영화 담론에서 한 발 물러난 전혀 다른 느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