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옥자’는 ‘괴물2’ 같은 영화였다. 차이라면 현서와 괴물은 맞서는 사이였던 반면 미자와 옥자는 가족 같은 친구 사이였다는 것 뿐이다. 괴물은 주한미군이 무단으로 방류한 독극물(‘옥자’에서도 루시의 언니 낸시가 독성 폐기물을 호수에 방류한 사실이 언급된다)이 빚은 참사였고 옥자는 유전자 조작으로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기업 탐욕의 비극이었다. 괴물과 옥자는 인간의 이기심 아래 희생양이라는 점에서 같다. 괴물도 괴물이고 옥자도 괴물이다. 봉준호 감독은 ‘옥자’를 통해 적으로만 간주되었던 ‘괴물’의 억울함을, 또는 적으로서만 유효했던 존재의 딜레마를 달래주려는 것 같았다.
‘옥자’는 은근히 반자본주의적이면서 명백히 반기업 정서를 내세운 영화다. 또한 버락 오바마가 참모들과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지켜보는 장면을 패러디 했다는 점에서 봉준호는 여전히 정치적이다. 나는 그런 ‘옥자’의 포스터에서 어쩔 수 없이 핑크 플로이드의 77년작 ‘Animals’의 환영을 보았다. 다른 점이라면 하늘에 뜬 9.1미터짜리 돼지 풍선이 땅으로 내려오고 그 돼지 위에 공장 단지를 얹었다는 것 정도다. 재력과 권력으로 착취와 억압을 일삼는 이들에게 날린 어퍼컷 펀치였던 핑크 플로이드의 걸작 재킷을 봉준호는 정반대로 해석한 셈이다. 때문에 ‘옥자’에 빗대어 정치 풍자와 사회 메시지를 함께 전한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를 봉준호 감독이 괜히 언급한 건 아닐 게다. 이는 “(대형)1종 면허는 있지만 4대 보험은 없다”는 미란도 그룹 트럭 운전수의 자조만 봐도 그렇다.
그런 ‘옥자’에서 음악은 중요한 변수다. ‘괴물’의 이병우 역할을 맡은 정재일의 섬세한 소리 디자인은 봉준호의 안목을 재삼 증명했다. 그리고 내가 주목한 세 장면에서 흘렀던 세 곡은 곧 이 영화의 주제와 정서를 암시한다. 평화, 투쟁, 그리고 사랑. 나는 봉준호가 정의로운 평화주의자임을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고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이며, 결국 사랑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봉 감독은 그런 자신의 신념을 음악으로 들려주었다. 유재하의 노래가 중심이 되는 ‘살인의 추억’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 음악들은 ‘옥자’의 핵심을 건드린다. 마틴 스콜세지의 작품들처럼 봉준호 영화에서도 음악은 시나리오와 영상의 값어치와 같거나 때론 그것들을 넘어서는 영역에 종종 선다.
첫 곡은 첫 장면에서 나온다. 양돈 대기업 미란도의 최고 경영자 루시 미란도가 슈퍼돼지 콘테스트 사업 발표회를 하는 동안 정재일의 현악과 타악은 ‘옥자’의 도입부를 훌륭하게 이끈다. 루시가 진지하게 말할 때엔 부드러운 선율을, 과도한 몸짓을 취할 땐 덜컹대는 드럼 연주를 입혔다. 그러다 한 노 기자의 질문(“언제쯤 다 큰 돼지를 직접 볼 수 있나요?”)이 이어지고 그에 대한 루시의 대답(“10년 후”)이 나오면서 영화 오프닝은 아이즐리 브라더스의 ‘Harvest For The World’에 안긴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고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오래된 펑크 소울 팝의 가사 내용이 ‘선의의 거짓말’로 포장된 루시의 프리젠테이션을 매듭지으며 영화는 곧바로 강원도 산골로 향한다. 바로 루시가 약속한 10년 뒤, ‘다 큰’ 슈퍼돼지 옥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때부터 봉 감독과 연을 맺어온 변희봉의 무르익은 연기를 맛볼 수 있는 산골 신(scene). 여기에서 봉준호는 옥자와 미자가 얼마나 친한지, 친하다 못해 가족 같은 사이인지를 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정재일은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구스타프 산타오랄라가 들려준 것과 비슷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둘의 우정을 축복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란도에서 파견한 조니 박사 일당이 옥자를 서울로 데려가고 미자는 돼지 저금통을 깨부수어 마련한 여비로 옥자를 찾아 떠난다. 어드벤처의 시작이다.
강원도 산골 신이 정적이었다면 서울 도심 신은 동적이다. 이른바 ‘옥자 구출 작전’이다. 지하철역 계단에서 섬뜩하리만치 꽉찬 인파 속 미자를 잡은 인상적인 부감숏과 옥자가 탄 트럭을 좇는 미자의 액션이 볼 만한 서울 시퀀스에서 관객은 또 다른 무리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동물 애호 단체 ALF(Animal Liberation Front)이다. 학대 당하는 동물들을 해방시키는 그들과 미자는 컴컴한 터널과 지하철 4호선 회현역 부근 지하상가에서 옥자를 구하려 몸을 아끼지 않는다. 그 사이 정재일의 음악은 숨가쁜 라틴 재즈로 바뀌고 도망가던 옥자가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음악은 존 덴버의 ‘Annie’s Song’으로 뜬금없이 전환된다. 영상은 '살인의 추억' 갈대밭 신을 닮은 슬로 모션으로 기울며, 존 덴버의 감미로운 사랑 노래는 미자와 옥자의 재회에 감동으로 스민다. 바로 이 영화의 두 번째 주제인 사랑이다.
그리고 투쟁. 봉준호는 ‘옥자’에 탱고 한 곡을 넣었다.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악단이 연주한 ‘A Evaristo Carriego’가 그것이다. 작곡가 에듀아르도 로비라가 아르헨티나 민중시인 에바리스토 까리에호에게 바친 이 곡은 조니 박사가 기다리고 있는 실험실에 옥자가 잡혀 들어가는 장면에서 흐른다. 나는 여기에서 나온 탱고를 봉준호의 분노로 여겼다. 흔히 탱고의 산지라 일컫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지역이 항만 노동자들과 도축업자의 피로와 권태로 찌든 우울한 은신처였다는 것을 감안해볼 때 이 곡이 갖는 의미는 분명 남다르다. 혹 봉준호는 탱고를 “투쟁은 곧 축제라는 믿음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말한 보르헤스의 정의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정재일의 음악이 잔잔한 어쿠스틱 포크와 가열찬 라틴 리듬 사이를 오가는 것 역시 때문에 나는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사람과 제도를 향한 비판의식에서 출발하는 봉준호 영화에서 음악적 필연이었던 것이다.
하마와 코끼리를 접목한 슈퍼돼지 옥자의 모습은 뭔가 억울해 보이는 모습이어야 했다고 봉준호는 말한다. 흔히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할 때 인간이 동물에게 갖는 아련한 동정심 내지는 친근감이 봉 감독의 저 말에는 있다. 실제 '옥자'는 사람과 동물 간 사연을 다룬다는 것에 봉준호가 높은 점수를 준 'SBS 동물농장'에서 큰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미자와 옥자의 귓속말 모습은 그 증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동물을 사랑하고 채식만 하자는 건 또 아니다. 육식을 하되 육식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 봉 감독의 뜻이었다. 미자가 먹고 싶어한 매운탕과 좋아하는 닭백숙, 그리고 마지막 할아버지와 손녀의 밥상에 계란 후라이가 올려져 있었던 건 다 그런 맥락에서 봉준호가 심어둔 질문들이 아니었나 싶다.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먹기 전에 죽여야 하는 비채식주의자들의 세상. 평화와 투쟁이라는 아름다운 이율배반이 세상을 지탱해나간다는 사실을 봉 감독은 여전히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