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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Oct 29. 2018

영화음악 감독 톰 요크의 첫 도전

Thom Yorke [Suspiria]


톰 요크가 ‘서스페리아’ 원작을 몇 번이고 다시 본 건 음악 때문이었다. 톰 요크는 77년에 태어난 저 유명한 호러의 고전이 이탈리아 지알로(Giallo)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의 작품이라는 사실보다 그 “말도 안 되게 강렬한 사운드트랙”을 예스와 제네시스, 킹 크림슨에 영향 받은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고블린(Goblin)이 연주했다는 사실에 더 주목했다. 그는 그 피비린내 나는 음악에 매료됐고, 영화감독과 음악감독이 작품을 위해 주고받은 “긴밀한 호흡”에 남몰래 감탄했다.



톰 요크가 전권을 잡은 '첫 번째 영화음악'이라는 카피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그가 걸어온 공식 커리어 상에선 맞는 말이지만 라디오헤드와 솔로 작업들을 통해 그가 들려준 음악에 비춰보면 살짝 갸우뚱하게 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음악들은 이미 완성된 정서와 맥락으로 언제든 영화에 삽입될 준비를 갖춘 음악들이었고, 더욱이 그것들엔 서스펜스 영화의 특징들(불안, 착란, 슬픔, 고독, 환상)까지 듬뿍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밥 딜런과 핑크 플로이드, 조이 디비전과 유투, 스미스와 소닉 유스를 등지고 브라이언 이노와 디제이 쉐도우, 뷰욕과 에이펙스 트윈에 둥지를 틀면서 라디오헤드는 실험을 담보한 차디찬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사무쳐갔다. 근작의 수록곡들, 이를테면 ‘Bloom’이나 ‘Ful Stop’, 톰의 솔로작 ‘Tomorrow’s Modern Boxes’에 수록된 ‘The Mother Lode’는 그 명확한 증거들이다. 18년 전 ‘Kid A’라는 낭떠러지에서 살아남은 라디오헤드의 팬들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린 톰 요크에도 기꺼이 열광했다. ‘Amnesiac’으로 이어진 저 극단으로의 함몰은 떨쳐버려야 할 죄악이 아닌, 라디오헤드와 톰 요크의 미래를 곧추 세울 축복이었다. 가령 ‘Treefingers’ 같은 곡은 단순히 한 음반의 한 트랙을 차지하는 수준을 넘어 그 자체 독립된 서사였고 분위기만으로 실체를 갖는, 글자 그대로 ‘영화 사운드트랙(Motion Picture Soundtrack)’이었다. 이러한 톰 요크의 음악 행보는 개봉되기도 전에 우릴 겁에 질리게 만든 리메이크작의 예고편처럼, 소리로 보여준 2018년 ‘서스페리아’ OST의 트레일러와 같은 것이다.



톰은 처음엔 이 사운드트랙 작업을 거절했었다. 그러나 'OK Computer' 시절 '파이트 클럽' 사운드트랙 작업 제의를 거절했을 때와는 다르게 톰은 이번엔 마음을 고쳐먹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설득도 이유였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마도 그가 작업을 하며 느낀 감정(“이번 작업은 살면서 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경우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 스스로 너무 잘 아는 그런 순간이었다.”)과 비슷한 맥락에 있었을 게다. 톰은 평론가 찰스 브라메스코의 말처럼 그렇게 “환각을 초래하는 동시에 기쁨과 고통이 공존하는 지옥으로의 여행” 같은 영화에 기꺼이 자신의 뒤틀린 예술혼을 투척했다.



작업은 1년 반이 걸렸다. 톰은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에서 울먹인 ‘You And Whose Army?’나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을 감쌌던 ‘Last Flowers’,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출구가 돼준 ‘Exit Music’을 제공하던 때와는 다른 입장에 놓인, 영화의 부분이 아닌 영화 전반을 디자인 해야 할 음악감독이라는 현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캐릭터들의 숨소리에까지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호러 영화라면 더 그랬다. 이를 위해 그는 원작에서 고블린의 접근 방식을 참조하되 참수했다. 영화와 음악의 거리를 무의미하게 만든 결과물로 역사에 남은 고블린의 전례는 톰에겐 큰 자극이 됐다. 영화음악은 그 작품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될 때 빛을 발한다는 가장 단순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톰은 고블린으로부터 훔쳤다. 단, 아티스트로서 표현은 고블린과 달리 하리라는 별도 축을 세우고 톰은 작업에 임했다. 그 옛날 ‘Suspiria’나 ‘Witch’만 듣고도 섬뜩할 수 있었던 고블린의 업적은 형식으로서만 톰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방법에선 다른 길을 살피게 했다.



그런 톰이 참고한 건 반젤리스의 ‘블레이드 러너’ 사운드트랙이었다. 그는 야마하 CS-80과 롤랜드 JP-4 같은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를 비롯해,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야마하 CP-80/펜더 로즈 일렉트릭 피아노, 가믈란(Gamelan, 발리/자바 섬에서 주로 쓰는 인도네시아 악기), 글로켄슈필(Glockenspiel), 공(Gong), 스네어 드럼, 팀파니, 튜블러 벨을 총동원해 디스토피아의 절망과 사랑의 창백한 낭만을 표현한 반젤리스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첫 영화음악 지침으로 삼았다. 피에르 앙리, 제임스 홀든의 현대음악 문법과 파우스트, 캔 같은 70년대 크라우트록의 벌판을 어슬렁거렸던 건 그 어둠의 미로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었으리라. 첫 트랙 ‘A Storm That Took Everything’과 ‘Klemperer Walks’를 들어보면 그 정황을 알 수 있다.



톰은 우선 악기 편성에서 군살을 뺐다. 일렉트릭/어쿠스틱 기타, 리켄베커 베이스와 펜더 프렛리스 베이스, 드럼과 타블라(Tabla), 엘카 오르간, 바이올린과 셀레스타(Celesta), 펜더 로즈 일렉트릭 피아노와 그랜드 피아노, 무그 신시사이저로 공포의 전율을 불러왔던 고블린에 비해 그는 스산한 ‘Has Ended’에서 아들 노아(Noah Yorke)가 연주한 드럼을 비롯해 피아노와 기타, 플루트와 모듈러 신시사이저 정도만을 장착해 자신의 여정을 떠났다. 3대의 바이올린, 교회 오르간, 그리고 8인 성가대를 세팅한 고블린의 멜로트론에 대해서도 톰은 2016년작 ‘A Moon Shaped Pool’에서 함께 한 런던 컨템포러리 오케스트라와 성가대를 내세워 그들과는 다른 세계를 추구하리란 걸 분명히 했다. ‘Suspirium’과 'Suspirium Finale'가 들려주듯 톰은 아무래도 'Black Forest'나 ‘Blind Concert’의 밴드형 록 그루브보단 ‘Blade Runner Blues’, 'Damask Rose' 같은 솔로형 우울 무드에 자신을 더 묻으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톰의 의도는 적중했다. 그는 반젤리스를 통해 고블린을 계승했고, 고블린을 지워가며 반젤리스를 복습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꿈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걸작을 리메이크 하게 돼서가 아니라 ‘Open Again’, ‘Unmade’ 같은 트랙을 만들 줄 아는 톰 요크를 음악 감독으로 섭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는 사람을 제대로 봤다. 톰은 이번 음반을 통해 자신이 음악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사카모토 류이치는 과연 이 음악을 어떻게 들었을까. 그리고 리메이크 완성본을 미리 본 쿠엔틴 타란티노가 구아다니노를 끌어안았듯, 원작의 고블린도 톰 요크에게 박수를 보내줄 것인지. 11월이 되면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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