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관리'의 미덕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해운대 소향씨어터에서 열릴 익스트림 내한 공연을 보러가기 위해 차 시동을 걸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2시간 정도 잡으면 넉넉할 줄 알았건만 가는 길은 의외로 더뎠고 결국 나는 첫 곡 ‘decadence dance’를 공연장 밖 모니터로 봐야만 했다. 그것은 빅히트 앨범 ‘Pornograffitti’에 수록된 ‘전곡 연주’가 콘셉트였던 2년 전 서울 공연과 똑같은 오프닝이었다.
보통 록밴드는 보컬과 기타리스트가 주도한다. 팬들의 관심, 밴드가 얻는 인기의 8할 이상이 사실상 두 사람을 향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가 이끄는 롤링 스톤스가 그렇고 존 본 조비와 리치 샘보라가 있는 본 조비가 또한 그렇다. 가끔 커트 코베인이나 지미 헨드릭스처럼 ‘보컬/기타’ 한 사람이 스팟 라잇을 독점하는 경우도 있고 퀸(Queen)이나 레드 제플린 같이 멤버 모두가 주목받는 경우도 있지만 내 얘기는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어제 만난 익스트림 역시 그런 ‘보컬과 기타리스트가 이끌어가는’ 밴드 중 한 팀이었다. 개리 셰론(보컬)과 누노 베텐코트(리듬/리드기타). 원년 멤버 팻 뱃저(베이스)가 조금 서운해할진 모르겠지만 익스트림은 'more than words'를 함께 부르는 저 두 사람의 밴드임에 틀림없다. 둘은 어제도 그걸 증명했다.
번쩍이는 검정색 가죽 스판 바지에 선글라스를 끼고 무대에 오른 게리 셰론은 환갑을 5년 앞둔 자신의 처지를 잊은 듯 온 무대를 휘젓고 다녔다. 누노가 솔로를 연주할 때 그는 어느 틈엔 누워있다 또 금새 앰프 위에서 ‘말타기’를 즐겼다. 이날 마이크를 그러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그의 퍼포먼스는 에너지 그 자체였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후련해지는 동작들의 연속, 그 느끼하지만 섹시한 춤 솜씨 역시 녹슬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가창력. 90년대를 통틀어 내가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록 보컬리스트(나머지 둘은 사운드가든의 크리스 코넬과 건스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다)인 만큼 그의 목청과 음색 역시 전성기 못지 않았다. 2집 [Pornograffitti]와 3집 [III Sides to Every Story]를 중심으로 두루 선곡된 10 여 트랙의 세트리스트 앞에서 그는 내지를 땐 거침이 없었고 기교를 부려야 할 땐 또한 한 없이 섬세했다. 게리 셰론은 어제 쇼맨십과 가창력을 완벽하게 갖춘 베테랑 보컬리스트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마이크 봉을 잡고 체조 선수 마냥 두 다리를 찢던 찰나, 그 앞에서 쉰 다섯 나이 따윈 시시한 표식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익스트림의 실질적 아이콘인 누노의 연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중력이 필요한 얼터네이트 피킹(Alternate Picking)과 감각을 요하는 태핑(Tapping) 연주를 그는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보다 헤비하게 요리한 데뷔작의 대표곡 'kid ego' 기타 솔로에선 조지 벤슨처럼 스캣(Scat)까지 선보이며 자신이 '기타 장인'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에드워드 밴 해일런과 지미 헨드릭스, 프린스와 알 디 메올라가 빼곡히 탑재된 그의 신들린 연주는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의 시선을 통째로 훔쳐갔다. 'it('s a monster)'와 'cupid's dead'는 그야말로 명불허전. 특히 스튜디오 버전을 그대로 재연한 'he-man woman hater'의 인트로 속주 'flight of the wounded bumblebee'에서 관객들은 할 말을 잃은 눈치였다. 밴 헤일런의 'eruption'에 버금가는 그 꿈결 같은 솔로는 26년 전 수 많은 기타 키드들에게 흥분과 좌절을 동시에 안긴 90년대 기타 히어로의 자기 증명이었다.
사실 익스트림은 95년작 [Waiting for the Punchline]까지 내고 한 번 흩어졌었다. 그들이 다시 뭉친 건 고향 보스턴 FM 라디오방송국 'WAAF'의 창립기념일 공연과 일본 투어를 겨냥한 2004년이었고 활동이 본격 가시화 된 건 2007년 정도였다. 그마저도 이미 8년이나 지났지만 13년 만의 복귀작 [Saudades de Rock]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후 밴드는 쉬지 않고 공연을 연거푸 소화해내고 있다. 데뷔 27년차 밴드가 이제 막 데뷔 한 밴드처럼 엄청난 투어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밴드의 자기 관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생각했다. 게리 셰론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마지막 앙코르 때 웃통을 벗어던지고 'suzi (wants her all day what?)'를 연주한 누노의 자신감은 뼈를 깎는 자기 관리 없이는 보여줄 수 없는 맥락의 것이다. 사람이 멋있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 어제 익스트림을 보고 그게 어떤 건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