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Dec 06. 2018

진심을 담은 소리

박지윤 [나무가 되는 꿈]


대중은 음악적으로 죽었다 깨어난 박지윤을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다시 첫 번째”라고 노골적으로 고백까지 했건만 포탈 사이트에서 박지윤은 여전히 ‘성인식’과 ‘루머(X파일)의 진상’ 등으로 검색되고 있었고, 그곳에 싱어송라이터 박지윤이 설 자리는 너무 좁거나 아예 없는 듯 보였다. 음악적 들러리였을 뿐인 지난 6장 앨범들이 대중의 뇌리에 남긴 이미지는 그토록 크고 질긴 것이었다. 그 크고 질긴 과거는 급기야 박지윤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조잡한 편견들로 비약했고 그 편견들은 다시 박지윤을 사진과 그림, 음악에 심취한 아티스트로 이끌었다. 편견이 편견을 지워낸 것이다. 그리고 박지윤의 2012년은 그런 아이러니가 빚어낸 가장 화려한 지점이었다. 


성인이나 남자로 상징됐던 신체적 발육이 아닌 사유와 창작을 통한 정서적 성장을 그녀는 비로소 이뤄낸 것이다. 버리고 내려서 얻어낸 자신만의 그 홀가분한 세상을 박지윤은 꽃과 나무라 불렀다. 꽃과 나무는 피고 자라는 것. 그녀는 스스로 1집이라고 밝힌 『꽃, 다시 첫 번째』로 피었고 이 앨범 『나무가 되는 꿈』으로 자란 것이다. 나무는 꿈이었지만 결국 그녀는 나무가 되었다. 이 작품에 담긴 음악은 그걸 뼈저리게 증명해 내고 있다. 



사실 박지윤의 성인식은 박지윤 음악의 장례식이었다. 그녀 말대로 그것은 “피로했던 부수적인 이미지”였다. 나와는 맞지 않다며 끊임없이 곱씹었던 고민과 의문의 연속. 자유와 여유가 그녀에겐 절실했다. 그러다 깨달은 ‘진심을 담으면 느껴지는 것이 예술’이라는 생각을 매듭짓고 박지윤은 자신의 7집이자 실질적인 1집에 임했다. 재킷 속 수묵의 여백으로 강조된 박지윤의 무념과 환생의 뉘앙스는 차라리 종교적인 것에 가까워 당시 앨범은 어떤 경건함마저 머금고 있었다. 게으른 대중이 박지윤 하면 으레 떠올리던 도발과 섹시함은 온 데 간 데 없이 앨범 『꽃, 다시 첫 번째』는 철저하게 인디적 감성을 지향했다. 관점에 따라 다소 엇박처럼 느껴졌을 박지윤의 그 파격적 컴백은 그러나 마침내 박지윤에겐 음악적 정박이었다. 그녀는 그 앨범으로 갈 길을 정했고 그 길을 따라 다시 3년을 걸어왔다. 


3년을 걸어 도달한 박지윤의 음악은 30대에 도달한 그녀의 예술적 자존심이다. 평범함과 실험성이 쌍벽을 이루는 가운데 장르의 구별은 무너지고 있다. 가령 첫 곡 「그 땐」은 옥상달빛의 멜랑콜리와 콜드플레이(Coldplay)의 모던한 규모감을 동시에 들려준다. 싫었지만 지금의 박지윤을 있게 해준 과거에 대해선 「그럴꺼야」같은 곡으로 우회적 답례를 시도했고, 디어클라우드의 김용린이 선물한 「고백」은 뮤지션 박지윤의 긍정적 미래를 비추듯 심상찮은 퀄리티를 자랑한다. 좋은 예감은 그녀가 쓴 「오후」와 「너에게 가는 길」에서도 똑같이 와 닿아 그녀의 꿈에 공감한 글쓴이를 흐뭇하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7분대의 대곡 「소리」와 권순관(노 리플라이)의 편곡이 돋보이는 「나무가 되는 꿈」은 정신 사나운 메이저 대신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인디를 택한 박지윤의 소리가 단순한 객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들려준다. 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고 그래서 소리는 예술이 될 수 있었다. 박지윤은 그걸 깨달았던 것이리라. 


박지윤은 스스로 1집이라고 밝힌 『꽃, 다시 첫 번째』로 피었고 이 앨범 『나무가 되는 꿈』으로 자랐다.


박지윤은 죽었다 깨어났다. 그녀를 죽인 건 대중이고 그녀가 깨어난 이유 역시 대중이다. 그녀는 소통을 위해 환생했다. 더 이상의 오해는 그녀를 두 번 죽일 것이다. 성인식은 끝났고 루머는 먼지가 됐다. 이제 남은 건, 음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쟁 같은 음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