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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Dec 07. 2018

시인이 만든 음악

허클베리 핀 [오로라피플]


바다 물살을 가르던 배가 바다 위 대기권을 지나 우주로 날아가는 풍경. 이기용은 첫곡 ‘항해’를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허클베리 핀의 여섯 번째 이야기를 상처입은 자신을 보듬어준 제주의 넓고 높은 풍경에서 찾았다. 자연과 공감을 전제로 한 중년 록커의 사유는 지독한 고독과 깨달음으로 점철된 무엇이었다.
 
허클베리 핀 6집에서 거친 록은 실종됐다. 분노 어린 사회성도 없다. 이기용은 디스토션 파워코드를 버리고 리버브 아르페지오를 장전해 자신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신스와 프로그래밍으로 음의 여백을 채색한 성장규는 그런 리더의 구상을 구체화 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노래 제목들처럼 ‘영롱’한 곳을 향한 ‘항해’인 그것은 아직 식지 않았을 “살랑살랑대면서 20대 여성들을 공략하려는 식의 인디 음악에 대한 혐오”(<블링> 2007년 10월호 인터뷰 ‘영원한 동시대의 밴드로 남기 위하여’에서)를 담은 완전히 새로운 그릇이다. 또한 음반은 한 권의 책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이기용의 이번 음악은 3집으로 일단락 됐던 허클베리 핀 음악의 전체를 다시 한 번 매듭짓는 과감한 모험이기도 하다. 앨범 '오로라피플'은 그야말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인 셈이다.



장르 상 드림팝으로 거칠게 정의내릴 수 있을 이번 작품은 ‘darpe’ 정도를 빼면 모든 곡들이 엇비슷한 심연에 빠져있다. 시쳇말로 ‘멍 때리는’ 감정의 체념이 그들 신작을 시종 꿰뚫고 있는 것인데 그 방법은 역시 가사의 은유다. 은유적 가사는 허클베리 핀과 떼어 놓을 수 없는 특징으로, 신보엔 그 은유의 궁극이 별처럼 박여있다. 이기용이 자신의 음악을 찾아주는 이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감정의 교류, 정신의 끈”은 언제나 그 은유에서 나와 은유로 산화했다. 나는 너의 다른 세계, 나는 너로 태어났어(‘항해’)라는 단 두 줄로 사람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허클베리 핀을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


이기용은 '항해'를 "바다 물살을 가르던 배가 바다 위 대기권을 지나 우주로 날아가는 풍경"을 그린 곡이라고 설명했다.


이 음반은 송라이터로서 이기용의 실험이기도 하지만 보컬리스트로서 이소영의 발견이기도 하다. 가수는 기본적으로 연기자여야 한다는 말을 믿어볼 수 있다면 이소영은 ‘너의 아침은 어때’ 같은 곡으로 명연을 펼친다. 그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밀봉된 마음 속 응어리들에까지 낭만의 메스를 댄다. 이어지는 ‘영롱’과 ‘라디오 (Radio)’, ‘오로라피플 (Aurora People)’과 ‘남해’를 통해 이소영은 그렇게 자신이 노래를 살아낼 수 있음을 차근차근 증명하고 있다. 좋은 음악을 만들고 좋은 음반을 내겠다는 이기용의 욕심은 이런 이소영의 보컬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목표다. 그리고 둘은 이번 앨범으로 비로소 그 목표에 도달한 듯 보인다. 힘을 빼고 텅 비우니 본질만 남은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나 해낼 순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이 작품을 듣다 생각나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를 20년 만에 다시 보았다. 하이라이트에서 조디 포스터는 웜홀을 통과해 만난 형언할 수 없는 우주의 풍광 앞에서 “시인이 왔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음반을 들으며 나도 비슷한 감탄사를 내뱉았다. 아, 이건 정말 시인이 만든 음악이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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