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s of Michel Legrand
가장 자유로운 음악 장르로 알려진 재즈는 적어도 국내에선 아카데믹이라는 출신의 그늘이 드리워진 권위의 장르이기도 하다. 봄 햇살의 가뿐함과 먹구름의 근엄함이 뒤섞인 음악이 재즈인 것처럼 재즈를 정식으로 배웠느냐 아니냐가 이 땅에선 뮤지션으로서 실력과 유명세의 척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재즈 보컬리스트 이부영은 자신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이 눅눅한 현실을 잠시 지우려 한 듯 보인다. 그는 딱딱하고 고집스러운 “학구적 재즈 어휘”에서 벗어나 자연의 조화물이라는 “본질과 핵심”을 좇기 위해 앨범 [Songs of Michel Legrand]을 내놓았다.
미셸 르그랑. 자크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 노만 쥬이슨의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등 수 많은 영화 음악을 작곡한 프랑스 거장이다. 오케스트라와 뮤지컬, 영화음악, 심지어 마일스 데이비스와 빌 에반스를 거느리고 재즈 앨범까지 냈던 사람의 오랜 고전들을 '인상주의 재즈 보컬리스트' 이부영은 과연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는 일단 드럼과 피아노를 빼고 기타 연주자 한 명, 클라리넷/색소폰 연주자 한 명을 자신의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 음악은 앨범 재킷 속 푸른 어둠 속으로 그대로 곤두박질 친다.
이 음반은 조작과 가미라는 인위를 거부한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조각들처럼 음악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듯하다. 줄이 숨을 쉬듯 들리는 박윤우의 아르페지오 기타 연주는 이부영의 목소리를 따라 공기처럼 배회하고 그 사이 빈 공간을 무겁게 짓누르는 여현우의 바리톤 색소폰은 실연당한 자의 퀭한 눈빛 마냥 서글프다. 다시 박윤우가 새벽이슬 같은 기타 솔로로 이부영의 읊조림을 적시고 나면 여현우는 소프라노 색소폰과 클라리넷으로 남은 자리를 박명처럼 물들인다. 이렇듯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은 속지 속 사진에 빚진 무채색이다. 행인은 뜸하고 고독은 만발한 곳을 거니는 이부영의 그 모습이 곧 겨울 입김 같은 자신의 목소리인 것이다. 밸런싱 엔지니어를 맡은 오디오가이 대표 최정훈씨의 바람대로 이 앨범은 그렇게 클래식처럼 자연스러운 소리를 소리없이 머금을 수 있었다.
이부영 5집은 기본적으로 재즈 보컬 앨범이지만 글쓴이처럼 키스 재럿보다 조 패스를, 강렬한 비밥보다 감미로운 쿨재즈를 더 즐기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 작품일 수도 있다. 멤버들 각각의 노래와 연주를 쫓는 맛이 재즈 감상의 미덕이라면 이 앨범 역시 그 미덕을 갖춘 작품이라 나는 말하고 싶다. 이부영의 보컬에 치밀하게 살을 입혀나가는 기타와 색소폰, 클라리넷 연주에 귀 기울여보자. 연주는 목소리를 지우지 않고 목소리는 연주를 지배하지 않는다. 연주와 목소리는 그저 서로를 지탱할 뿐이다. 그리고 둘은 끝내 서로를 보듬어 하나가 된다. 물론 이부영과 미셸 르그랑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