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erve [The Urban Hymns]
버브(The Verve)의 데뷔앨범 [A Storm in Heaven]은 같은 해에 나온 스웨이드(Suede)의 데뷔작 [Suede]의 인기에 못 미쳤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평단의 환영과 팬들의 외면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던 이상한 앨범이었고, 앨범은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남아있다. 이듬해 오아시스(Oasis)와 블러(Blur)가 각각 [Definitely Maybe]와 [Parklife]로 브릿팝신을 좌지우지 하고 있을 때 버브의 미래는 더욱 불안해 보였고 두 번째 앨범 [A Northern Soul]을 하필 오아시스의 걸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와 같은 때 내면서 버브는 또 한 번 평단의 칭찬에만 만족해야 했다.
당시 절친이었던 리차드와 노엘은 'A Northern Soul'과 'Cast No Shadow'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과시했지만 둘의 현실은 사람 관계 만큼이지 못했다. 팬들은 왜 버브를 외면했을까. 버브는 평론가들에 의해 심심찮게 쓰여졌지만 팬들에게 많이 팔리진 않았다. 팔리지 않음으로써 밴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경제적으로도 상처를 입었다. 버브는 결국 첫 해체를 맞고 만다.
하지만 리차드 애쉬크로포트(Richard Ashcroft)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전 멤버들인 사이먼 존스(Simon Jones, 베이스)와 피터 세일스베리(Peter Salisbury, 드럼)를 다시 불러들였다. 거기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닉 멕케이브(Nick McCabe) 대신 스웨이드를 떠난 버나드 버틀러(Bernard Butler)를 그 자리에 세우기도 했다. 물론 며칠을 넘기지 못한 탓에 궁여지책으로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사이먼 존스의 기타 스승이기도 한 사이먼 통(Simon Tong, 기타/키보드)을 밴드에 합류시켰지만 이 라인업은 1996년 한 해를 그냥 흘려 보내고 만다. 밴드의 유일한 공식 활동이라면 리차드가 오아시스의 뉴욕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 뿐. 버브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러던 중 닉이 밴드로 돌아왔다. 버브 말곤 제대로 된 안식처를 찾을 수 없었다는 감동적인 변명을 들며 그는 사이먼 통과 트윈 기타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97년 초여름까지 이어진 3집 레코딩. 그것은 밴드 측의 표현을 빌어 "영혼이 담긴" 작업이었고 영혼은 결과적으로 회심의 역작이 나올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바로 [Urban Hymns]다.
9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 [Urban Hymns]
빈 틈도 버릴 곡도 없었다. 버브 3집은 완벽했고 판매고는 영국 차트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했다. 잘 생긴 첫 곡 'Bittersweet Symphony'가 터져 나왔을 땐 버브의 미래도 밝아졌다. 영국 밴드에겐 짜기로 소문난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도 이 곡은 12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건 밴드 통산 최고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딴죽은 예외 없이 영광의 순간을 재물로 삼는 것인지 곡의 원작인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The Last Time'에 오케스트라 양념을 친 앤드류 루그 올드햄(Andrew Loog Oldham)은 "베껴도 너무 베꼈다"며 버브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버린다. 다행히 결과는 'The Andrew Oldham Orchestra - The Last Time' 버전의 주인이 아닌 원곡 주인 롤링 스톤스 측에 저작권이 있는 것으로 판결, 가까스로 논란은 일단락 됐다. 'Brown Sugar' 이후 키스 리처드(Keith Richards), 믹 재거(Mick Jagger) 콤비가 쓴 최고의 곡이라며 리차드 애쉬크로포트가 극찬한 'The Last Time'의 90년대 버전은 그렇게 한 바탕 소동을 치르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야말로 달콤 쌉쌀한(Bittersweet) 에피소드였던 거다.
이어지는 사랑의 시 'Sonnet'과 아버지의 죽음 같은 리차드의 개인사를 가사로 풀어 쓴 'The Drugs Don't Work'도 빼놓을 수 없다. 두 곡의 그림 같은 멜로디와 추상의 감성은 싱어송라이터 리차드 애쉬크로포트의 예술가적 역량을 대번에 알게 해준다. 음악을 듣고 벅차 오르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건 곧 살아있다는 뜻일 텐데 두 곡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듣는 이들에게 그것을 체험케 한다.
지난 두 장 앨범에서 리차드는 이런 곡들을 안 쓴 것일 뿐 못 쓴 게 아니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발매 당시 국내에서 가하려 했던 가위질을 리차드가 용납하지 않아 정상적 루트론 쉬 접할 수 없었던 'The Drugs Don't Work'는 역설적으로 다른 선후배 뮤지션들로부터 잦은 카피를 당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안엔 자신의 라이브 앨범 [Live from Mars]에 이 곡을 실은 벤 하퍼(Ben Harper)가 있고 여러 면에서 버브의 영향이 느껴지는 스타세일러(Starsailor)의 제임스 월쉬(James Walsh)도 있다. 버브의 첫 영국 싱글 차트 1위곡. 그 영광 역시 'The Drugs Don't Work' 덕분에 누릴 수 있었다.
리차드 다음으로 중요한 멤버인 닉 멕케이브의 색깔은 그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러쉬(Rush) 같은 인트로, 리암 갤러거(Liam Gallagher) 같은 목소리,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 같은 기타 톤이 힘있게 전개되는 ‘Rolling People'과 나른한 'Neon Wilderness', 2집의 'Butterfly'가 흘린 "나비효과"라는 주제를 공유하는 'Catching the Butterfly' 정도가 단서로서 알맞을 것이다. 조이 디비전(Joy Division)과 존 마틴(John Martyn), 그리고 팔리아먼트 펑카델릭(Parliament-Funkadelic)의 리드 기타리스트였던 에디 헤이즐(Eddie Hazel)을 좋아하는 닉 멕케이브는 데뷔 때부터 딜레이(Delay)와 리버브(Reverb)를 기타 소리 전반에 먹이길 즐겨 스페이스 록, 슈게이징 성향에 가까워 보였다. 그 습관이 저 세 곡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온전히 기타리스트 닉 멕케이브의 스타일이 된다. 굳이 가져다 붙이자면 "네 멋대로 해라" 정도의 선동이 될 끝 곡 'Come On'의 기타 톤도 그 맥락에 어울리는 것이리라. 이 곡의 코러스는 리차드가 오아시스의 'All Around World'에 참여한 것에 대한 리암 갤러거의 화답이기도 했다. (리암은 'Space and Time'이라는 멋진 곡에서 박수 소리까지 보태며 버브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아낌없이 표했다.)
[Urban Hymns]는 2010년 브릿어워드 "지난 30년 사이 최고의 브리티시 앨범"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아쉽게도 오아시스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를 넘어서진 못했다. 하지만 이런 앨범이 등수에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99년, 두 번째 밴드 해체를 확인하고 무려 9년 뒤 버브의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듣게 될 줄 알았다면 그 2등에도 우린 기립박수를 보내야 했을지 모른다.
1997년, 버브는 무엇을 써도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고 시적인 가사가 되었다. 'Lucky Man'과 'One Day'는 그런 면에서 숨은 보석들이었다. 그 땐 정말 모든 상황과 운이 밴드의 실력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2008년, [Forth]가 나왔다. 큰 기대감에 영국 차트에선 당연한 듯 1위를 했지만 그 기대감이 완전히 채워지진 못했던 기억이다. 그게 벌써 11년 전 일. 리차드 애쉬크로포트는 이제 알피에이 앤 더 유나이티드 네이션스 오브 사운드(RPA & The United Nations of Sound)라는 밴드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엔 [Natural Rebel]이라는 솔로 앨범도 냈다.
결국 우리에게 버브란 그 때도 지금도 [Urban Hymns]였던 셈이다. “응답하라 1997”. 그것은 드라마 제목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