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홀’ 주성민 대표
뮤지션 이승환이 매년 팬들을 위한 소극장 공연을 열고, 홍대에 처음 진출했던 서태지가 자신의 무대로 선택하기도 한 서울 하나투어 브이홀(브이엔터테인먼트) 대표 주성민 씨는 진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진주를 대표했던 메탈 밴드 집시에서 보컬과 기타로 활약했으며, 고 신해철이 운영한 레이블 소속 밴드 스키조를 이끌기도 했다. 그는 진주를 '음악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해준 고마운 도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봄이 덜 여문 막바지 겨울, 서울 홍대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말투가 진주 출신은 아닌 것 같다.
출신은 서울이다. 진주로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를 간 거다. 중앙'국민'학교(현 진주초등학교)와 남중학교, 그리고 세광공고를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스쿨밴드 생활을 했고 고3 때 프로 밴드 생활을 시작했다. 밴드로 성공하고 싶었고 뮤지션도 되고 싶었다. 메탈 밴드 ‘집시’를 결성한 이유다.
▲진주에 ‘헤비메탈 신(scene)’이라는 게 있긴 했었나.
물론이다. 엄청 활성화 됐었다. 90년대 진주고등학교, 동명고등학교, 삼현여고 등엔 기본으로 밴드 한 팀씩은 다 있었다. 경상대학교 스쿨 밴드 기라성의 후배들은 크루로 모여 메탈 킨(Kin)이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고, 크라이스트라는 나름 유명했던 헤비메탈 밴드도 진주 출신이었다. 크라이스트는 이제는 전설이 돼버린 부산의 미스테리, 스트레인저와 동급 밴드였다. 94~5년 진주에선 부산 못지않은 밴드의 시대가 열렸었다. 그 시절 ‘락앤롤코리아’라는 전국 투어가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크라잉 넛을 처음 만났다. 아직은 인디 신이 활성화되기 전, 크래쉬와 블랙홀, 블랙 신드롬이 록의 패권을 쥐고 있던 때였다.
▲계속 진주에 있었어도 됐지 않나.
군대 갔다 온 2년 여 사이 신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서울에선 인디 음악이 태동하며 완전히 새로운 록의 세계가 준비되고 있었지만 진주에선 록밴드로서 더 할 게 없었다. 그래도 음악은 계속 해야겠기에 기타 한 대 들고 다시 서울로 온 거다. 나중에 함께 하게 될 부산·경남 밴드 스키조도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
▲음악은 어떻게 좋아하게 됐나.
동네 형이 이문세 팬이었다. 그 영향을 받아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는데 어린 마음에 국내 노래는 왠지 퀄리티가 약해보였다. 과거 진주 신안동에 말도 안 되는 작은 레코드가게가 있었는데 그때부터 재킷만 보고 테이프를 사기 시작했다. 물론 <핫뮤직> 같은 잡지들도 좋은 음반가이드였다. 집에 전축이 있어 LP도 사 모았는데 신문배달 같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은 거의가 음반 구매로 들어갔다. 내 리스너 인생에서 이문세 시절은 제법 빨리 끝이 났다.
▲음악은 무얼 들었나. 주로 록을 들었을 것 같긴 한데.
다양하게 들었다. 비틀즈, 헬로윈, 리차드 막스, 빌리 조엘 등등 올드팝부터 록까지 두루 좋아했다. 가장 처음 접한 헤비메탈 앨범은 메탈리카의 [라이드 더 라이트닝]과 슬레이어의 [헬 어웨이츠]였는데 공교롭게도 두 장 모두 2집이었다. 당시엔 슬레이어 쪽에 더 귀가 갔는데 메탈리카 3집 [마스터 오브 퍼펫츠]를 듣곤 메탈리카로 갈아탔던 기억이다.(웃음)
▲성민 씨는 기타리스트다. 기타는 어떻게 익혔나.
원래는 드럼을 쳤다. 헬로윈의 드러머 잉고 쉬미히텐베르그가 너무 멋져 진주교 인근에 있던 중앙악기사에서 30만 원짜리 삼익 드럼을 사달라고 아버지를 조르다 마당의 물호수로 처맞고 포기했다가 자연스럽게 기타로 바꾸었는데, 처음으로 산 전기 기타 역시 같은 가게에서 산 8만 원짜리 몬타나 기타였다. 그땐 요즘같이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오로지 책으로만 독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땐 비디오를 보며 익혔다. 딥 퍼플의 ‘스모크 온 더 워터’ 같은 명 리프를 가진 곡들을 귀로 듣고 따서 연습하곤 했다.
▲진주는 본인에게 어떤 곳인가?
위기의 시절이 있었지만 음악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준 고마운 도시다. 저는 음악으로 꿈꿨던 일은 다 이뤘다. 우상으로 여겼던 사람들과 같이 공연도 하고 친해지기도 했다. 딱 하나 세계적인 록스타가 돼서 전세기 타고 다니는 건 못 이뤘지만.(웃음) 다른 명예는 거의 다 이뤘다.
▲집시라는, 진주에선 제법 유명했던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다.
집시는 연합팀이었다. 고등학교 밴드 생활할 때 동명고 쪽에 제 소문이 났다. 당시 제가 마샬 앰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게 소문이 난 거다.(웃음) 다트 아니면 재규어 앰프가 고작이었던 시절 마샬 앰프로 기타를 친다는 녀석이 있다고 하니 궁금했었나보다. 얼마나 잘 하나 보자며 그들이 찾아왔다. 우린 교복 입고 연습하고 있는데 저들은 가죽 잠바를 입고 온 거다. 그때 복학생 한 명과 친해졌다. 프로 밴드를 준비하고 있다며 다른 친구가 한 명 더 있는데, 셋이서 밴드 안 해볼래 제안해왔다. 그렇게 집시가 탄생했다. 그땐 제대로 된 클럽도 없어서 다방을 빌려 공연하고 그랬다. 크래쉬, 블랙홀, 블랙 신드롬, 멍키헤드, 게임오버 같은 밴드들 오면 서포트 밴드로 무대에 서고.
▲집시는 프로 밴드인데 앨범은 남기질 못했다.
자작곡은 있었는데 앨범을 만들 수가 없었다. 카세트 데크로 녹음해 데모 정도만 만들었다. 포스텍스 타스캠 멀티트랙이란 게 있었는데 비싸서.(웃음) 당시 멤버 모두 프라이드를 타고 서울 신촌으로 녹음하러 간 적이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지막에 취소돼버렸다. 블랙 신드롬, 레이니 썬, 피아 등 밴드 수 십 팀이 참여했던 포천의 한 록페스티벌에서도 폭우가 쏟아져 공연을 못 했던 기억이 있다. 참가비 10만원까지 냈었는데.(웃음) 참고로 집시의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는 이후 레이니 썬으로 가 활동했다.
▲그러다 스키조를 결성했다.
2001년도 즈음이었다. 소속사 사장도 친구였고, 인디레이블처럼 처음엔 우리끼리 꾸려서 시작했다. 그러다 파라다이스미디어아트라는 정식 회사와 전속 계약을 했다. 우리가 첫 아티스트였다. 2003년에 1집을 냈고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기획 앨범에도 참여했다. 회사에서 지원을 잘해줘서 방송에도 많이 출연했다. 일단 의대생, 일본인 등 멤버들 캐릭터가 독특했고 음악도 스톱과 체인지가 많은 핌프락과 결이 달라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고 신해철님과 인연은 그 즈음 이뤄진 건가.
형님이 진행했던 ‘고스트TV’에 섭외가 됐다. 끝나고 술 한 잔 하자 해서 형님 작업실로 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마왕의 작업실은 ‘좌 만화, 우 양주’였다. 독서를 많이 해 책들도 참 많았다. 그날 코냑을 함께 마시며 형님이 ‘옛날부터 너네 좋아했다. 같이 하자’ 해서 방배동에 문을 연 ‘빅뱅’과 전속 계약을 했다. 당시 우리 팀은 보컬과 제가 샘플 프로듀싱이 가능해 곡 작업을 많이 해둔 상태였다. 트랜스픽션과 넥스트, 스키조가 전국 투어를 돌던 시절이었지. 그러다 SBS의 투자를 받아 해철 형님이 '사이렌'을 공덕동에 오픈하고 2006년 스키조 2집이 나왔다. 당시 서태지가 이끈 괴수대백과사전과 신해철이 사령탑을 맡은 사이렌은 이 바닥에선 투탑이었다. 두 회사의 공통점은 음악 외엔 철저한 메이저 프로모션을 추구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뮤지션들에겐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뮤지션들은 아무래도 자기만의 세상, 사상을 추구하게 마련이니까. 대신 매니저와 직원들이 좀 고생을 하긴 했다. 사이렌에선 2집까지만 내고 해철 형에게 우리끼리 하겠다 얘기하고 나왔다.
▲고인의 타계 전 그의 건강상태는 알고 있었나.
몰랐다. 형님이 쓰러져 혼수상태라는 걸 저도 기사를 보고 알았다. 장례식 발인 때 참석했고. 저에겐 고마운 사람이었다. 배운 것도 많았고, 그 분 덕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스키조의 재결성 가능성은 없나.
스키조는 2012년부로 멤버들이 다 탈퇴한 상태다. 예전 멤버들은 음악계를 다 떠나 재결성을 해도 새로운 멤버들과 하게 되지 싶다. 보컬과 조율 중이다. 한다면 젊은 친구들과 해보고 싶다.
▲브이홀을 운영해온 지 10년이 넘었다. 부침 같은 게 있었을 것 같은데.
블랙 신드롬 영철이 형님과 함께 투자를 받아 시작했었다. 물론 처음엔 적자를 많이 봤다. 이후 음향, 조명, 무대 감독과 저 이렇게 4명이서 꾸려왔다. 저는 홍보 쪽에 관심이 많아 영업, 홍보, 공연장 관리를 주로 맡아 했다. 예컨대 싸이월드 클럽에서 공연 보러오는 사람에겐 초대권을 주는 식의 이벤트를 열곤 했다. 그렇게 몇 년 하니까 자리를 잡아갔다. 수익도 발생하고. 밴드들 위주로 프로모션도 제법 했다. 에브리 싱글 데이, 이상은, 로맨티스코, 더 모스 등. 밴드 리플렉스는 3년 정도 직접 제작을 하기도 했다. 요즘은 브이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슈퍼스타K 출신 마틴스미스와 2년째 연을 이어오고 있다. 콘서트도 열고 제작도 하는 중이다.
▲브이홀은 어떤 공연장인가.
500~600석 규모로 비보이 콘서트도 하고 내한공연도 많이 한다. 물론 모던록도 많다. 초창기 땐 힙합이 강했는데 언젠가 빈지노도 '꼭 서보고 싶었던 무대'라며 브이홀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승환 선배는 매년 여기서 팬들을 위한 소극장 공연을 연다. 서태지도 자신의 홍대 최초 공연을 브이홀에서 했다. 그는 새벽부터 사운드 등 모든 걸 직접 감독했는데, 본 공연 땐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천정의 먼지가 다 떨어질 정도였다.(웃음) 브이홀은 팬들과 소통하려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홍대 인디 신을 오래 봐왔다. 과거 홍대와 지금 홍대, 무엇이 달라졌나.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로 유흥과 문화는 공존하게 마련이다. 둘이 적절히 섞여야 하는데 요즘 홍대는 유흥 쪽으로만 흐르는 게 아닌가 싶다. 홍대는 부동산업자들과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변질됐다. 너무 상업적으로 가다보면 신촌과 이대처럼 상권이 죽고 문화가 죽는다. 문화는 한 번 죽으면 끝이다. 문화는 정부가 만드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수 십 년에 걸쳐 만드는 것이다. 정부가 '문화공간'이랍시고 뚝딱 만들어 운영한들 기존 문화 유산을 대체할 수 있을 리 없다. 차라리 그런 세금은 문화단체나 영세공연장 지원금으로 쓰는 게 더 낫다. 정부는 그저 뭐만 지어놓으면 다 되는 줄 안다. 한국 정부의 특징은 '무조건 짓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국 뮤지션들의 자립심까지 막아버린다.
▲밴드들이 공연을 하지 않는 추세다. 할 이유를 못 느끼겠다고 한다. 뭐가 문제일까.
바뀐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밴드들의 공통점이라고 본다. 아무리 해도 팬이 안 생기고. 원인은 그들 스스로가 찾아야 할 것이다. 스키조나 크라잉 넛, 노브레인과 장기하와 얼굴들의 컨셉을 누가 만들어준 게 아니다. 각자 나름 고민해서 음악 스타일과 비주얼을 만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시대와 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파악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전문가나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의 기획, 컨설팅, 아이디어로 팀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아쉽다. 지금은 음악 활동 자체가 엄청 복잡해졌다. 맞고 아니고를 매뉴얼로 정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1을 2로 바꾸는 게 아닌, 1+1을 고민해야 한다. 걸그룹과 헤비메탈 밴드를 접목한 일본의 베이비메탈이 좋은 예다.
▲가장 가까운 미래의 목표, 앞으로 계획을 말해달라.
마틴스미스 제작에 집중할 것이고 그들이 오래 활동해 큰 아티스트가 됐으면 좋겠다. 물론 장르 구분없이 새로운 친구들도 발굴해보고 싶다. 산소를 주입해주면 알아서 숨을 쉴 줄 아는 친구들과 작업해보고 싶다. 스키조는 글쎄, 언젠간 컴백하지 않을까.